‘안아주다’의 진화론적 사색

by 이채이

제인 구달의 침팬지 영상을 보았다. 죽어가던 침팬지 운다가 치료를 받고, 야생의 천국으로 돌아가는 장면이었다. 운다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제인 구달을 안아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침팬지는 오래 제인을 안고 마음을 전했다. 마치 사람처럼.


나는 침팬지가 두 팔로 제인을 안을 때, 제인이 침팬지를 안을 때, 두 종 사이의 먼 진화의 간극과 유대의 흐름이 느껴졌다. 직립 보행하는 인간이 되기 전, 우리도 침팬지처럼 서로를 껴안으며 마음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침팬지는 악수하고, 서로의 뺨을 만지고, 뽀뽀하며 애정을 표현한다. 하지만 고양이는 달랐다. 산책길에서 만난 고양이가 옆에 앉은 삼색 고양이를 핥아주긴 했지만, 서로 오래 껴안고 마음을 전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앞발은 싸움과 방어에 적합하게 진화했을 뿐, 사랑의 도구로는 사용하기 힘들다. 만약 고양이도 두 발로 서서 손처럼 앞발을 마음껏 쓸 수 있었다면, 그들도 침팬지처럼 포옹을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두 팔로 안아주는 것. 아이가 엄마에게 안기고, 엄마가 아이를 안는다.

피에타의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려앉는다. 세상에 갓 나온 아이도, 세상의 짐을 다 지고 죽은 아들도, 어머니의 품에 안겼다. 서른세 살의 아들을 안고 시름에 잠긴 어머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후의 사랑을 두 팔에 담아 간직했다.


나는 진화의 끝에 손의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로를 안고 쓰다듬는 과정 속에서, 사랑과 보호, 생존을 배우며 손은 자유를 얻었다고 여긴다. 위협으로부터 누군가를 지켜주기 위해, 혹한의 겨울 나뭇가지를 비벼 불을 피우기 위해, 인간의 손은 지난한 삶을 견디며 진화해 왔다.


손의 역사는 곧, 서로를 안아주고 마음을 전하며 살아온 시간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 기록은 지금, 손끝에서 시작되는 작은 온기로 이어진다. 커피를 건네고, 머리를 쓰다듬고, 포옹을 나누는 순간마다, 오늘을 살아갈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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