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베(Grave)의 겨울

by 이채이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겨울 눈이 세상을 덮으면 동백의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

나의 사람들이 남긴 숲길의 발자국을.

기억이란 지나간 시간을 되잡는 일이 아니라,

다음 순간을 향해 나를 조용히 밀어주는 방식이라는 것을.


바닷가 언덕을 걸었던 순간의 설렘은 발걸음의 수만큼 쌓이고 있었다.

왼걸음을 딛는 순간, 오른걸음은 이미 빈 공간을 향했다.

자연스레 잡은 손의 힘이 아니라, 놓지 않겠다는 마음이 나를 푸근하게 했다.

꼭 쥔 손의 온기가 맥박을 따라 온몸으로 퍼지면, 기분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지난주엔 사랑하는 이들과 유달산 언덕에 다녀왔다.

돌로 깎은 층계마다 울퉁불퉁하던 날들이 우리의 20년을 반질하게 닦아 놓았다.

그건 겹겹이 쌓인 페스츄리 같아서 압축된 시간을 바삭하게 음미할 수 있게 했다.


상처 많은 꽃잎을 만지며 나는 '때가 일러서 동백이 덜 피었겠지' 했고,

너는 날이 추워 피다가 얼어붙은 거라고 했다.

나는 바람이 흔들어댈 꽃들을 걱정했다. 멀리 하늘이 붉어지고 있었다.


석양이 와서 박힌다. 동백나무 꽃봉오리가 노을을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그림밖에 모르는 너는 붓으로 물감을 찍어서 점점이 꽃을 그려 넣는다. 너의 발치에 물감을 흘려보내면, 맨발의 너는 붉어진 발가락으로 캔버스를 밟는다. 걸어간 자리마다 어지럽게 꽃이 피어난다.


시밖에 모르는 나는 자주 각혈의 꿈을 꾼다.

구슬을 토해내는 여우의 늑골이 바스라지게 수축하면, 나는 한 송이씩 발갛게 토해낸다.

울컥울컥, 동백이 쏟아진다. 나는 이 꿈이 심리적 병리 때문이 아님을 안다.

끝내 피지 못한 것들을 오래 지켜본 자의 내면, 그 오래도록 남은 불균형 때문임을.


수평선 너머로 밀려오는 코발트 빛 고래 떼가 방해를 놓았다.

밤새 꿈속으로 파도가 들이치고,

어두운 코발트 빛이 각혈을 서서히 씻어 내렸다.


새벽이 섬 너머까지 번져오면 고래 떼는 자취를 감추고,

빛의 꼬리를 단 어선들이 아침놀을 싣고 와선, 항구에 부린다.


아침놀이 와서 다시 박힌다. 동백나무 꽃봉오리가 아침놀을 깊이 호흡하기 시작한다.

이럴 때면 나는 시간의 속도를 늦추고 싶어진다.

안단테가 아니라, 그라베(Grave)처럼. 천천히 흐르며 온전히 흡수하여, 마침내 붉어지길 소망한다.

너무 빠르면 빛은 들떠서 흩어지고

서둘러 지나버린 계절엔, 엷은 흔적만 남을 테니까.


당신의 시간 너머 로즈힙이 익는 동안, 우리는 달려 겨울 바다에 이르렀다.

발바닥은 부어올랐고 종일 숨이 가팠다.

동백꽃은 겨우내 피어, 우묵한 어둠을 따스하게 물들일 것이다.


나의 시간이 너의 시간 옆에서, 조금 느리게 흘러가길 바란다.

각자의 보폭으로 살아가다 끝내 같은 풍경 앞에 늙어 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동백의 시간이다.

호랑가시나무의 시간이다.

로즈힙이 붉어지는 시간이다.


다만 그뿐이야,라고.



*그라베(Grave) 느리고 장중하며 깊게 흐르는 시간과 호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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