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말

by 이채이

말은 귀에서 죽는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오래 믿지 못했다. 흘러간 말들이 가끔 가슴 안에서 살아 움직였다.

잊었다고 여긴 사람도 문득 기억에 걸린다.


성묘를 다녀오는 길이면 이미 떠난 이가 따라온다.

아버지 무덤 앞에 청솔 가지를 꺾어 놓고 절을 하던 때가 있었다.

까슬한 잔디 위에 손을 짚고 허리를 숙이면 말수는 저절로 줄었고, 눈가만 가득 젖었다.

그곳에서는 아무 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시인이 편지를 보내왔다. 설 이야기였다. 나는 자꾸만 과거로 기울었다.

세배가 아름다운 풍경이라 말할 때 웃으면서도, 세뱃돈을 쥐여주던 그날의 손을 떠올렸다.

무엇에 썼는지는 흐릿하다. 하지만 쌈짓돈을 건네던 어른들의 커다란 손은 또렷하다.

이유도 모른 채 나는 그 마음을 받았다.


십여 년 전, 새언니가 말했다.

“삼천만 원만 땡겨달라.”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도와주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다. 도와주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결국 거절했다.


나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단호했고, 전화기를 내려놓은 뒤에야 손이 후들거렸다. 그 뒤의 일은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 빚은 번졌고 사람들은 흩어졌다. 그때 조카들이 어렸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고향을 떠올리면 못 해준 일보다, 하지 않은 일이 먼저 떠오른다.


어리던 조카가 올해 결혼한다. 엄마 없이 자란 아이를 생각하면 가슴 어딘가가 뭉근하게 반응한다. 그때보다 지금이 더 아린다.


발길은 나를 걱정하던 사람이 서 있던 쪽으로 기운다.

저녁 어스름 가운데 후레쉬를 들고 서 있던 그림자.


그날 나는, 나를 먼저 지켰다.

그날의 말은 아직 남아 있다.

명절이 오면

그 말이 먼저 떠오른다.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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