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남긴 음각

by 이채이

생각 없이 글을 쓴다. 그저 손가락이 하고 싶은 대로 둔다.

가끔 머리가 끼어들어 방향을 틀면 그쪽을 한참 바라보다 손가락은 제 일을 한다. 보법에 익숙한 피아니스트처럼 악보집과 손가락의 협응이 만들어 낸 소리는 차곡차곡 쌓인다.


노트북 화면의 글자가 돋을새김처럼 떠오른다. 먹지가 배접된 종이 위로 강하게 때려 새기는 방식이 아니라, 물이 빠지며 생겨나는 바닷길처럼 문장이 그렇게 드러난다. 손목이 시큰대고 어깨가 뻐근해도 창밖이 어두워지는 줄도 모른 채 오래 앉아 있는 것은, 한 줄의 글이 오르는 순간을 지켜보는 일이 좋아서다.


많은 말을 해버린 날이면 빈 접시만 쌓인듯 마음이 달그락 거린다. 남은 것은 접시에 흩어진 부스러기 말들뿐이다. 그날의 문장들은 나를 지나쳐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끔 롤케익처럼 단단하게 말린 부드러운 단어가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그때 나는 뜨거운 물을 부어 좀 더 차를 마신다.


함부로 말해버린 뒤에는 늘 잔열이 남는다. 땅으로 스며들지 못한 번개가 거목을 쪼개듯, 선명한 빛이 뇌를 가로지른다. 작열이 남는다. 식지 않은 통증이 오래 머릿속을 배회한다.


그런 순간이면 내가 쓴 글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문장을 멀리 밀어냈다고 생각했는데, 문장은 그 자리에 남아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돌아오기를, 변명 없이.


글을 통해 나를 드러낸다고 믿는다. 그러나 드러낸다는 것은 강하게 새기는 일이 아니라, 그 자리에 배어있던 무늬가 천천히 돋아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지우고 싶었던 문장이 흐려지고, 무심코 눌러 적은 말이 더 또렷하게 떠오른다. 애써 설명하려던 말은 흐려지고 무심이 적은 문장이 나를 더 정확히 남긴다.


나는, 내가 남긴 음각 앞에 서 있다.

끝내 남는 것은 내가 아니라 문장이다.

숨을 곳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계속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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