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때 오는 것들 사이에서

by 이채이

조계산의 흙길이 폭신해서 발걸음을 부드럽게 받아주었다. 친구들과 밑이 훤히 뚫려 있다는 오래된 뒷간 이야기를 나누었고, 물소리와 빈 산의 공명을 말했다. 절집 뒷마당 연못에 깨어난 맹꽁이들이 높은 소리로 귀청을 자극했다. 음정이 불화하게 치솟고 퍼져서 절집은 고요하게 왁자왁자했다.


나는 경칩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셈해 보았다. 닷새쯤 더 남아 있었다.

울음주머니를 부풀리는 소리가 연못에 가득했다. 경칩이 며칠 더 남았는데 땅속의 것들이 벌써 깨어나서 울어대는구나, 하고 말하려다 말았다.


절집에도 제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긴 겨울 안거가 막바지에 닿아 있었다. 정월 보름이면 스님들의 동안거는 끝날 터이다. 선암매는 아직 눈 뜨지 않은 채 나지막한 돌담에 이마를 얹고 있었다. 해제의 날을 향해 수행이 여물어 가고 있었다. 눈꺼풀이 슬며시 들리며, 선암매는 잠에서 각성하고 있었다. 선암사는 녹아내리는 땅처럼 고요하게 시간을 받아내고 있었다.


살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기다리면 반드시 돌아오는 것이 있다는 것.

얼마 전에 지난 입춘이 그랬고, 곧 녹아버릴 눈이 그랬다. 겨울을 건너면 봄이 찾아오고 결코 징검다리로 건너뛰지 않는 것이 그렇다. 짧은 생의 경험으로 여름과 가을의 순서가 뒤바뀐 적이 없었고 선배 시인들의 시 속에서도 계절이 제 순서를 어긴 적은 없었다. 틀림없는 일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간 절집에서 만난 것은 기대했던 개화 소식이 아니라, 선암매에 붙들린 나의 마음이었다. 깊은 침묵 속에서 겨우 눈을 뜨려는 선암매를 두고, 묵언 수행을 마친 삼지닥나무에서 은빛 종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마침내 망울진 꽃잎을 터뜨릴 것이다.


기다리면 오는 것이 있다.

스스로 그러하구나 생각하다가,

나는 기다려도 오지 않던 것을 떠올렸다. 이제는 얼굴도 흐릿한 사람이었다.


선승은 연신 운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잊힌 것들을 불러들이려는 사람처럼,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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