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돌지 못한 탑

by 이채이

가슴에 두 손을 모으면, 심장에 살던 소망이 팔을 타고 내려온다.

합장의 뜻을 잘 몰라도, 손바닥 안에 잠시 세상을 받아 쥐고 있는 기분이 든다.

맞댄 손에는 묘하게 버티는 힘이 있다.


오랜만에 화엄사에 갔다. 의상이 모셔왔다고 전해지는 붓다의 진신사리 75과.

모신 곳이 분명하지 않아도 천 년의 시간쯤은 각설탕처럼 사리를 천천히 녹였을 것이다.

사라진 것들은 사람의 무릎을 타고 우리 몸 어딘가로 스며들었을지도 모른다.

부처의 땅은 좀 더 은근해졌을까.


사람들이 숨차게 계단을 올라오면 이내 탑돌이 인파에 휩쓸린다.

오른쪽 어깨를 탑신에 둔 사람들의 소원은

사자의 울림에 자꾸만 감겼다.


합장하고 탑을 세 바퀴 돌면 바람이 이루어질까.

한 바퀴를 겨우 돌아나왔을 때 소나무 한 그루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이 여러 번 비틀린 채로 오래 서 있는 나무였다.


태백에서 내려온 찬 바람이 능선을 타고 흘러 어딘가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일어났다.

섬진에서 올라온 온화한 강바람과 그 자리에 겹쳐졌다.


그 사이에서 소나무의 몸이 조금 더 비틀렸다.

나는 발이 몇 번이나 꼬였다.

살다 보면 만남이 어긋나 흐르는 순간도 있다.


화엄사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었다. 화엄의 땅을 걷다가 때늦은 불두화를 함께 보고 싶었다.

나는 늘 그곳에 있었지만 그 사람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약속이 어그러진 날이면 각황전을 지나 백팔 번뇌의 계단을 기어오르곤 했다.

올려다볼 때마다 겹겹이 놓인 경사가 내 숨을 조금씩 가져갔다.


내가 그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석등처럼 선명한 화엄의 풍경에 잠시 나란히 서 있고 싶어서였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불두화와 삼백 년을 넘긴 들매의 그늘에 앉아 목을 축이는 것이었다.

버려진 석물에 나란히 앉아 때늦은 동백 이야기를 하고, 아직 따뜻한 알감자를 나눠 먹고 싶었다.

그 마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관계는 땀을 식히던 그늘에, 나 혼자 남는 방식으로 기억되었다. 그때 이미 인연의 끝을 어렴풋이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만남이라는 말은 끝내 제 모습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헤어졌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수피를 벗던 소나무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중생들의 소망을 한 올씩 잡아 제 몸으로 끌어간다.

이른 봄볕에 잘 마른 소망 덕분인지 연신 등이 따갑다.


나는 탑을 차마 다 돌지 못했다.


끝내 오지 않은 어떤 것을

잊게 해달라는 소원이

이루어질 것만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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