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오후가 되면 흑백텔레비전 속에서 막대기를 끼운 인형들이 우리를 기다렸다. 그 인형극의 이름은 <삼국지>였다.
유비는 꽃미남처럼 반듯했고, 관우는 얼굴이 붉고 수염이 길었다. 장비는 덩치가 컸고 조조는 눈이 사선으로 찢어져 있었다.
동네 남자아이들은 자기 이름 앞에 삼국지 인물의 이름을 붙여 불렀다. 유비 창수, 관우 대섭 이런 식으로.
마음에 드는 캐릭터일수록 서로 차지하려는 경쟁이 심했고, 모여든 아이들의 나이나 힘의 서열에 따라 그날의 역할이 정해지곤 했다.
하지만 제 이름 앞에 조조를 놓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작은오빠는 어린 나에게 조조라고 명명하며 별명처럼 불러댔다. 자기는 유비라고 하면서. 서열이 낮은 사람이 놀이에 끼려면 어쩔 수 없었다. 폼나지 않는 일을 도맡는 사람이 늘 있기 마련이듯이.
유비 오빠는 나를 조조라고 놀려대며 나무로 깎아 만든 칼을 들고 연신 싸움을 걸어왔다. 못생긴 조조라거나 못 돼먹은 조조라며 멸시 어린 장난을 걸곤 했다. 다른 집 동생들은 조조라고 안 하면서 나에게만 그렇게 불러대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겨울 어느 날 나는 심하게 아파 눕게 되었다. 열이 오르고 밭은기침을 했다. 나무칼을 찬 오빠는 조조가 죽게 되었다며 장난을 걸었지만, 나는 대꾸도 할 수 없을 만큼 뜨거웠고 고개를 가누기조차 힘들었다. 그날 말없이 방안을 서성이는 유비의 기척을 느꼈다. 숨이 꼴까닥 넘어갈 것 같았고 나는 곧 바스라질 낙엽 같았다.
어머니가 배에 꿀을 넣어 달였다. 종일 앓는 나의 입에 흘려 넣어준 배즙이 썼다.
어머니는 한약방에 약을 지으러 떠난 저녁이었다.
가끔 입안으로 물을 떠 먹여주는 유비. 배즙을 먹여주는 유비.
그 순간의 유비 오빠는 인형극 속 주인공처럼 제법 의젓하고 정의로워 보였다. 하지만 입술은 하얗게 말라 있었다.
어른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유비가 아랫마을 당골을 불러왔다.
대문간에서 기다리던 어머니가 당골네를 맞이했다. 흰머리 당골 할멈이 숨 가쁘게 걸어 들어왔다.
밤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는 말을 했다고도 하고, 밤만 잘 넘기면 된다고도 하고.
열에 들뜬 머리와 무겁게 가라앉는 몸은 불화하였다.
아마 그쯤이었을 것이다.
따뜻한 물 한 방울이 입술로 흘렀다. 찬물을 떠먹이던 유비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유비는 조조에게 말하고 있었다.
"내일은 니가 유비해라. 내가 조조할게."
유비의 눈물 때문이었을까, 당골네의 손비빔 때문이었을까. 어머니가 지어오신 약 때문이었을까.
나는 기억할 수 없을 만큼 깊고 긴 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수저가 담긴 물그릇과 까맣게 마른 약사발이 눈에 들어왔다.
이불을 걷어 내니 유비의 목검이 남겨져 있었다.
그 목검이 나를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