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면 잠깐 정원을 둘러봅니다.
천천히 걸어 텃밭까지 갑니다.
'곧장'이라는 말은 봄의 정원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침이 서서히 이슬을 털며 잎을 키워갑니다.
유일한 곧장은 느린 것들을 향한 나의 마음뿐입니다.
고양이들이 키위나무 등걸에 앉아 내려다봅니다. 잎이 없는 나무의 주인은 하얀색 마스카라를 찍은 듯한 검은 고양이와 그 자녀들입니다.
새끼들이 나무에 생겨난 작은 귀 같은 목이버섯을 건드립니다. 제 귀를 한 번 만지고 목이를 슬쩍 손댑니다. 나무와 고양이는 오래 알고 지낸 사이 같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문득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텃밭에 가서 쪽파와 풋마늘 두어 뿌리를 뽑습니다. 올해는 땅 주인이 집을 짓는다고 하니 손바닥 농사도 끝입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아침의 초록이 조금 더 아깝습니다.
겨울 끝의 텃밭은 초록뿐이라 빨강과 노랑이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모든 색을 섞으면 검정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든 빛을 섞으면 하얗게 밝아집니다. 빛은 그렇게 투명해져 세상을 보게 합니다.
땅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쪽파나 풋마늘은 빛을 혼합해서 저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발은 뽀얗습니다.
겉으로 보면 채소는 초록으로만 발산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뽀얀 수염뿌리를 보면 말없이 모든 빛을 모아 온 땅속의 것들에게 숙연해집니다.
채소를 먹는다는 것은 나의 피를 초록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초록을 먹다가 손끝까지 초록이 됩니다.
텃밭 채소를 먹으면 마음이 온순해집니다. 마구마구 선량해지고 싶습니다.
빨강과 노랑이 끼어들 틈을 만들기 위해 토마토 모종이나 메리골드 씨앗 같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땅 주인이 내년 아니 내 후년쯤 집을 지으면 좋겠습니다.
붉고 푸르게 일렁이는 작은 텃밭에서, 맨발로 땅을 흡수하는 나를 상상하는 것이 여전히 즐겁기 때문입니다.
나는 빛이 가진 모든 색을 섞어
아무것도 아닌 색으로 살아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