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든 즈음의 세 사람
나는 최근 여든 즈음의 세 사람을 만났다.
가장 먼저, 우리 엄마다. 1942년생인 엄마는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 6·25 전쟁을 겪었다. 일곱이나 되는 동생들을 돌보느라 학교는 늘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젊은 시절, 엄마는 남편을 잃고 홀로 4남매를 키워야 했다. 그 가난의 시대에, 여성 혼자서 아이 넷을 키우는 삶은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엄마는 고 이건희 회장과 동갑이다. 그는 수많은 부와 권세, 그리고 시련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엄마 역시 그 못지않은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아왔다.
또 한 명은 가수이자 화가인 조영남이다. 얼마 전 그를 만났을 때, 팔순잔치를 치렀노라 했다. 걸음은 눈에 띄게 느려졌고, 발뒤꿈치까지 힘이 닿지 않아 앞꿈치에 의지해 천천히 움직였다. 걷는 내내 다리는 떨렸고, 누군가 부축해야 안정적으로 걸을 수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젊고 건강해 보였지만, 노환의 그림자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마지막은 직접 만난 이는 아니지만, 책으로 만난 김훈 작가다. 그의 산문집 『허송세월』은 나이 듦을 구체적이고 냉정하게 매만지고 있다. 흑단 같던 머리카락은 어느덧 빗자루처럼 거칠어졌고, 눈은 병든 짐승처럼 세월의 찌꺼기를 덕지덕지 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오히려 더 번뜩인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곁에서 오래 지켜본 사람보다 더 깊이 그를 이해하게 되는 느낌을 받는다. 글은 그런 힘을 갖고 있다.
나는 이 세 존재 앞에서, 그들 안의 젊은 시절을 더는 읽어낼 수 없다. 젊음은 풍화되어 흔적이 옅어졌고, 손마디는 화석처럼 굽었다. 그러나 그들도 한때는 장구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술에 취해 객기를 부리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시절은 이제 잠잠해졌고, 누구와의 논쟁도 대거리도 필요치 않은 나이가 되었다. 세월은 그렇게 모든 것을 잠재운다.
노화란 결국, 수십 조의 세포가 하나둘씩 기능을 멈춰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생명은 단 하나의 세포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의 뇌는 평균적으로 약 1,000억 개의 뉴런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단순한 세포가 반복된 분열과 증식을 거쳐, 어느 순간 질적으로 도약한다는 말일까? 그 세포들이 장기를 만들고, 뇌를 형성하며, 마침내 신경계로까지 분화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어떤 설계도를 따라 그 복잡한 일을 거의 오차 없이 수행하는지, 우리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면 세포는 죽어가고, 결국 무한한 결합체였던 인간 역시 수명을 다해 사라진다. 그렇게 인간은 자연의 이치 속에서 평화롭게 저물어간다.
얼마 전 조영남 선생님을 만났을 때, 나는 물었다.
“선생님, 제가 쉰이 넘었습니다. 앞으로 30년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의 대답은 놀랍도록 단순했다.
“인생 별거 없어. 그냥 하고 싶은 거 해.”
“재미있는 거 해. 재미없으면 하지 마.”
그의 말은 너무 단순해서 오래 남았다. 남은 젊음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는 노인의 언어로 가장 가볍게 말했지만, 그것은 가장 무거운 조언이었다.
노인이 곁에 있으면 배울 것이 많다. 그들은 ‘노인’이라는 이름을 달가워하지 않겠지만, 그 고요하고 단순해진 일상에서 나는 내 인생의 노을을 상상하게 된다. 저물어가는 하루를 묵묵히 살아가는 그분들을 보며, 나의 해질녘 역시 겸허히 맞이할 준비를 한다. 30년 후, 나 역시 그들과 비슷한 모습일 것이다.
노을 지는 늘그막은 아름답다. 모두가 맑은 하늘 아래 저녁을 맞는 것은 아니지만, 먹구름 속에서도 저마다의 노을은 분명 존재한다. 나는 그들 셋 모두, 평온한 밤을 맞이하리라 믿는다. 누군가는 시골의 평범한 농부로, 누군가는 가수이자 화가로, 또 누군가는 작가로. 살아 있는 동안 어떤 이름을 가졌든, 그들은 결국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간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