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만들어 드립니다

by 이채이

많은 사람에게 '기억'은 과거의 일이 그대로 말라 있다가 물을 부으면 팽창하고 촉촉해지는 코인 티슈처럼 생생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기억은 경험을 보존한 '기록'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기억은 과거에 그랬다고 ‘현재의 나’가 믿고 있는 심리적 구성물일 수 있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사건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는 믿음은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다.

심지어 애초에 과거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그 과거를 기억한다고 믿을 수 있다."

나는 아이를 키울 때, 버틀런드 러셀의 이 말을 자주 떠올렸다.

'기억은 객관적 진실이 아니라 주관적 내러티브일 수 있다'는 말이다.


연구에 의하면 “어릴 적 쇼핑몰에서 길을 잃은 적 있다”라는 가족의 ‘증언’을 들은 아이들의 약 25%가 전혀 없던 일을 “선명하게” 떠올렸다는 보고가 있다. 이는 누군가의 말만으로도 기억이 생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억을 '새로 써줄 수 있다'는 의미로 읽혔다.


정도의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아이를 키우다 보면 부모는 아이에게 일정 정도의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가질 수 있다. 아이가 자라고 자기 생각을 하게 되는 소위 '미운 나이'가 되면, 심리적 다툼을 반복하게 된다. 아이는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지만 부모는 그 미안함을 오래 기억한다.

그러나 부모의 기억 또한 진실을 기억한다기보다는 현재의 내가 구성한 과거처럼 보이는 내면의 장면을 떠올리고 있을 수 있다. 이게 해소되지 않으면 부모는 내적 불행을 겪게 되고 이는 아이에게 전이된다.


기억은 회상할 때마다 변형될 수 있고, 가짜 기억도 매우 쉽게 형성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를 역으로 이용하기로 맘먹었다.

말 안 듣는 꼬마를 대문 밖으로 쫓아내기도 하고, 어린아이에게 회초리를 들기도 했으며, 수시로 외면하고 미워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 약간 조정된 과거를 심기 시작했다.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긍정적이고 좋은 기억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사진을 보거나 동영상을 보면서 기억을 덧붙이는 방식이었는데, 이는 아이의 기억이 시각적 이미지와 단단히 결합해서 신뢰를 높였다.

새 기억이 과거의 사진과 연결되면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아이는 자신의 지난날을 긍정하는 생생한 과거를 가지게 되었다.


아이의 기억은 젖은 점토처럼 유연하다. 부정확하고 흩어진 기억의 땅 위에, 따뜻한 감정의 기억을 아주 심는 것. 나는 이것을 ‘기억의 모내기’라고 불렀다. 논 전체에 볍씨를 흩뿌리는 대신 모판에 볍씨를 뿌려서 튼실하게 기른 다음, 제대로 정돈된 논에 아주심기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간헐적이고, 마치 물 위에 떠다니는 부유물처럼 가볍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심어진 기억은 오래 남고, 현재와 과거를 섞어서 더 굳건히 자리 잡게 한다. 행복하고 긍정적인 과거를 심고 미안하고 죄스러운 과거는 빼버렸다.


이처럼 모내기 방식으로 심어진 기억을 가진 아이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는지를 안다. 이 기억은 성장하면서 삶의 확신으로 자리 잡고 두려움을 없앤다.

아이는 실제의 과거보다는 주입된 과거를 더 잘 기억한다는 믿음이 내게는 있었다. 이로 인해 기억은 우화 하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새롭게 살아 움직이게 되었다.


이 방법이 처음엔 구차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아이에게 긍정적 내적 기반을 주었다고 믿는다. 뿐만 아니라 내 안의 미안함과 후회를 회복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이 생각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셉션>에서 착안한 것이다.

<인셉션>은 타인의 무의식에 ‘자신의 생각인 줄 아는 아이디어를 기억처럼 느끼도록 설계’하는 이야기다. 기억은 감정과 연결되어야 진짜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감독은 주인공의 꿈속에서 죽어가는 아버지의 유언과 유년 시절의 금고, 바람개비 등 상징적 물건 등을 이용해 정서적으로 일관된 ‘감정 경험’을 설계하고 심었다.


천재적 발상의 이 방법은 나와 아이의 과거를 미세 조정하고, 불운한 과거를 씻어내기에 충분했다.

내적 불행을 경험하는 어른이라면 자식에게든 나의 과거에게든 '기억의 모내기'를 해보자. 한결 홀가분함을 경험할 것이다.

기억을 다시 쓰는 것은, 과거에 얽힌 감정을 가다듬어서 미래를 다시 꾸리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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