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한 지 30년이 되어간다. 그 시절엔 가난하다고 기죽지 않고 성적이 별로여도 개의치 않았던 것 같다. 가난은 나의 잘못이 아니었고, 대학은 개인사적 결핍을 눈여겨 다룰 만큼 다정하지 않았다. 대부분 비슷한 형편이라, 결핍은 어디에나 기본값으로 주어져서 특별히 비극으로 여겨지진 않았다.
매일의 삶을 삼시 세끼 밥을 먹는 일에서 시작한다고 할 때의 밥은, 나름 공평하며 후덕한 구석이 있었다.
후문을 따라 생겨난 식당가에는 좁은 골목마다 다닥다닥 미닫이문을 단 밥집이 있었다. 찌개가 끓고 감자탕이 보글거리고 스텐 공기에 밥을 퍼서 담는 그런 식당이 대부분이었지만, 간간이 맥주를 파는 호프집과 인테리어로 멋을 낸 전통 주막도 있었다.
좁은 골목은 활기가 있었지만, 간밤의 취객이 내지르고 간 토사물과 오래전부터 엉겨 붙은 밥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온갖 찌든 것의 냄새는 골목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늘 거기 붙들려 있었다. 좁고 구부진 길 가운데 '웅이네'라는 밥집이 있었다.
웅이네는 학생들이 좋아하는 볶음밥으로 인기가 많은 식당이었다. 웍에 센물로 볶아낸 밥은 양이 많아 특히 식탐 있는 공대생들 사이에 입소문이 났다. 여학생 둘이서 하나만 시켜 먹어도 눈치를 받지 않을 만큼 인심이 좋았다. 배고픈 대학 시절의 웅이네는 언제든 허기를 달래고 타향살이를 다독여주는 따뜻한 위로의 집이었다.
지금은 위치가 바뀌었지만, 당시 중앙도서관 앞에는 학생 조합원 식당이 있었다. 자장면이 600원이고 돈가스가 800원 백반은 1,000원이었다. 이 가격은 졸업하는 내내 변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혼밥’이란 단어조차 없던 시절이라, 혼자 밥 먹는 건 이상하게 보이기도 했겠지만, 나는 조용한 홀로 식사가 더 좋았다.
당시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감당해야 했던 나는 방학이면 아이들을 가르치며 돈을 모아 다음 학기 등록을 하고, 자취하던 집의 방값을 냈다. 남겨둔 돈으로 한 학기 생활을 했는데, 형편이 넉넉할 리 없었지만, 학생 식당에서 하루 세끼를 해결하다 보면 그다지 부족하다 느끼지 않았다.
식당에서 백반은 국과 밥, 일부 반찬은 리필이 되었다. 퇴식구로 향하는 친구의 빈 식판을 가로채서 리필을 받아와 밥을 먹는 남학생도 있었다. 버리는 식판을 제 것으로 재활용하던 그 사람은, 지금쯤은 어디에서든 살아남았을 것이라고 가끔 생각한다.
일생을 두고 가장 가난했던 대학 시절의 나는 왜 기죽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비록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감당해야 했지만, 대학 안엔 기회의 공기가 가득했고 내겐 매일 매일의 꿈이 최고의 대접을 받던 시절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햇살이 좋은 날은 잔디밭에 앉아 시집을 읽으며, 100원짜리 자판기 커피에 '에이스'를 찍어 점심을 대신했다. 에이스 한 조각이 종이컵에 담긴 밀크커피를 적실 때. 바삭함은 유지하되 커피의 쌉싸름한 맛은 머금은 상태. 그 순간의 맛을 좋아했던 것 같다. 학생 시절은 그렇게 달콤 쌉싸름하면서도 바삭한 그런 가벼움이 있었다.
이제는 에이스 과자도 자판기 커피도 먹지 않는다. 웅이네에 가서 양 많은 볶음밥을 주문하지도 않고 학생 식당의 백반 줄을 길게 서지도 않는다. 돈은 넉넉해졌지만, 그 시절처럼 어떤 한 끼에 위로받는 일은 드물어졌다. 가난과 희망, 풍족함과 결핍 사이에 나는 뭔가를 잃어버린 허전함을 느끼며 갈팡질팡한다. 생각해 보면 기죽지 않는 패기와 열정은 애초부터 가난과는 등가 될 수 없는 값이었으며 젊음이 누리는 특권 같은 것이었다.
1,000원의 밥 앞에서 우리는 고루 공평했다. 희망은 값으로 매겨지거나 대체 되지 않았다.
나에겐 그리고 당신에게 그런 시절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