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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챌린지맘 Jun 16. 2023

도시처녀 군인가족이 되다(2)

서울로 이사 후 계룡-계룡 미워

강원도와 경상도는 극과 극이어서 1박 2일 이사 밖에 안 된다고 했다.


내가 살아야 하는 관사는 일 차선 옆으로 저수지가 있었고 저수지를 지나면 딱 한 동만 우뚝 서 있는 아파트였다.

긴 한숨과 함께 나는 이삿짐을 풀었다.


이곳은 밤에는 리얼하게 부엉이가 울었고, 낮에는 바로 옆 사격장에서 ‘탕탕탕’ 하는 총 쏘는 소리가 났다.

나는 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는 사람도 없었고, 그렇다고 차를 끌고 나갈 곳도 없었다.

그저 뱃속에 있는 아이와 남편이 퇴근할 때만 기다렸다.


왜 그땐 토스트에 딸기잼을 발라 먹는 게 그렇게 맛있었는지..

움직임도 별로 없던 나는 하루에 한통씩 토스트를 만들어 먹었다.

점점 나는 우람해지고 그 모습을 거울로 본 나는 남편에게

“오빠.. 나 여기서 사육당하고 있는 것 같아.”

하면서 울곤 했다.

검진일이 다가와 병원을 갔는데 매달 5kg씩 살이 찐 나를 보고 의사 선생님이 아예 먹는 걸 먹지 말아야 한다고 겁을 주셨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그해 5월에 친정으로 가 아이를 출산했다.

예정일이 지나도 나오지 않던 아이라 그날도 아이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이미 병원에 갔을 땐 자궁이 90%나 열린 상태였고 신랑 없이 나는 아이를 낳았다.


친정에서 50일까지 몸조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간 나는 남편과 아이와 셋이서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남들은 통영과 거제를 자주 가보지 못하지만 나는 10분밖에 안 걸리는 통영을 내 집 드나들 듯이 다니며 이쁜 바다를 보고 항상 감탄에 젖어있었다.


12월에 발령이 나서 우리는 공룡나라 고성을 떠나게 됐다.

대성통곡을 하면서 온 고성이였는데 떠날 땐 너무 아쉽고 섭섭했다.


감사한 일도 많았고, 이쁜 바다를 실컷 볼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다. 지금도 고성을 떠올리면 가슴이 설레고, 첫사랑 같은 곳이라 매년 아이들과 이곳을 찾게 된다.


서울로 이사 간 우리 가족은 2년 동안 살았다.

서울에서 둘째 아이도 출산했고 6개월 뒤인 2011년에 계룡으로 이사를 갔다.


생전 들어본 적이 없는 동네라 계룡이 어디에 붙어있는 동네냐고 물어보니 신랑은 대전 옆에 있는 군사도시라도 했다.

 군인가족들이 살기 좋은 동네라며 아마 공기도 좋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를 했다.

부푼 마음을 가지고 이사를 했다.


신랑은 항상 이른 출근에 늦은 퇴근과 주말에도 근무를 하러 나갈 이쎄이 많아서 나 혼자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신랑은 특수보직이라서 나와 친하게 지내려는 사람들도 없었고, 늘 나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느 더운 날 혼자서 둘째를 업고, 큰아이를 뽀로로 자전거에 앉혀서 밀고 가고 있는데 버스정류장에서 쉬고 계신 버스운전사 아저씨를 만났다.


나를 보시더니 안쓰러운 표정으로 아이엄마가 너무 힘들어 보인다고 이야기를 하셨다.


그 한마디에 나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친정도 멀어서 가지도 못하고, 만날 친구도 없고.... 정말 내가 이러려고 결혼했나 싶었다.

신랑을 볼 때마다 나는 으르렁 거렸다.


그런데 둘째 아이가 계속 아팠다. 계룡은 병원이 몇 개 안 되는데 돌도 안 된 아이를 데리고 갈만한 병원이 마땅치 않았다.

대전으로 나가야 병원이 갈만한데 동네 운전 실력만 가지고 있는 내가 고속도로를 타기가 쉽지 않았다.


아이가 자주 아파서 새벽에도 건양대병원 응급실도 자주 가고, 뜬눈으로 토를 계속하는 아이와 나흘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결국엔 아빠친구분인 소아과 의사 선생님께 연락을 해서 소개받은 병원으로 갔다.


소아과는 신탄진에 있었고, 신랑은 근무시간에 나올 수 없어서 신랑에게 두 번만 집하고 병원만 운전연수를 부탁했다.


 나는 아이들은 카시트에 태우고 덜덜 떨면서 운전을 해서 병원을 다녔다.


공기 좋은 곳에 살고 있는데 아이 기관지가 자꾸 왜 이리 안 좋냐며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고, 나는 이때부터 계룡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점점 나는 사나운 사자가 되어갔다.


혼자서 울기를 반복했고, 아이들에게 아주 나쁜 엄마가 되어갔다. 베란다를 쳐다보며 나쁜 생각을 가져보다가도 이건 아니지 하고 생각을 바꾸었다.


신랑은 항상 바빴다.


어느 주말에 날씨는 좋고, 혼자 갈 곳이 없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집 앞에 있는 두계천에 갔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둘째와 첫째를 데리고 꽃도 보고, 계곡을 보면서 걷고 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다른 사람들은 아빠가 아이를 안고 뛰면서 갔지만 나는 아이 둘을 데리고 뛸 수도 없었다.


저 멀리 굴다리가 보였다. 둘째를 안고 첫째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굴다리에 도착해서야 비를 피할 수 있었다. 비가 그칠 때까지 우리는 이곳에 있어야 했다. 나는 점점 더 슬퍼졌다.


그렇게 2년이란 시간을 계룡에서 보내고 떠날 때 큰소리로 나는

“다시는 이쪽(계룡)을 보고 똥도 안 쌀 거다.”라고 하며 2013년 문산으로 이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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