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빚, 마음의 빛

가장 가난한 어미의 하늘같은 자존감

by 에스더


우리 가정에

날벼락이 떨어졌던

지난 8월


신랑의 가혹했던 실직과 함께

아내인 내가 당장 해야 했던 것은

극단적인 긴축이었다.


우유, 신문, 상조,

쿠팡, 코스트코,

멜론, 유튜브 멤버십,

눈높이, 스쿼시를

모두 끊었고,


통신 최저 요금제,

편의점, 카페, 다이소, 문방구의 발길도

즉시 멈췄다.


수십만 원의 고정비가 사라졌고,
나의 일상도 송두리째 사라졌다.


이 많은걸

끊어내기 전에는 몰랐다.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모든 걸음걸이마다

돈을 지불하고 있었다는 걸.


한 번에 끊어낸 일상들로

거리를 걷는 것 자체가 곤욕이었다.


스치는 소비의 장소들을

독하게 지나쳐야 했고,

걸음걸이마다 이것저것 사달라고 떼쓰는

아이를 달래기도 버거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끊어내기

가슴 찢어지는 것이 있었다.


바로

피아노


나의 유일한 아이들 사교육이자

아이들의 유일한 힐링 시간이었던

피아노 학원.


15개가 넘게 끊은 내 일상과 맞먹는 학원비는

폭격을 맞은 가정에서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학원 중단 소식에

아이들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아이들에게

피아노 학원은

피아노를 배우는 곳이 아닌

원장님이라는 한사람을 만나는 곳이었다.


60세를 훌쩍 넘기신 연세에도

단아하고 우아한 옷차림으로

아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시는


원장님은


둘째와 다리 찢기 놀이를 해주시고

첫째의 학교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아이들의 유치한 농담에도

깔깔 거리시며 아이들에게 행복을 주신다.


쌀쌀한 날씨에 외투를 안 가져온 둘째를

본인의 외투를 둘둘 말아서

집 앞까지 데려다주시는 분이었다.


그런 그분에게

사랑이 많은 둘째는 시도때도 없이

“한번 안아봐도 돼요?“ 하며

원장님 품에서 살았다.


아이들에게 그분은

피아노 보다 더한 사랑이었다.


특히 첫째에게는

4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그곳으로 향했고

체르니50과 베토벤을 배우는

인생의 일부와도 같은 것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것을 잃은 상실감에

흐느끼는 아이를 지켜보는 애미의 마음은

천 조각으로 찢긴다.


그럼에도

더 무서운 것은

가정에 휘몰아친 눈앞의 생존이었다.


지칠대로 지친 나는

불쌍한 내 새끼를 달래줄 여력도 없이

모질게도 단호했다.


다음날,

원장님을 찾아뵀고,

신랑의 취직이 불투명한 상황이라

아이들의 레슨을 중단해야 한다고 했다.


4년을 단 한 번의 결석도 없었던

학생의 레슨 중단 소식은

그런 성품의 원장님으로선

지켜볼 수 없는 것이었나 보다.


상할 대로 상한 몰골로

마음이 찢기고 있는 한 애미를

말없이 안아주신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다 잘 될 거예요.
아이들을 그냥 보내주세요.

“……아이 하나도 아니고 둘을...어떻게…“


가난한 애미 눈에 눈물이 차오른다.


이것만은 끊고싶지 않았던,

간절해 하는 내 새끼를 지키고 싶었던

가난한 애미에게는 그분의 제안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화줄이었다.



아이 둘을 훌륭하게 키웠다고 해주셨다.

음악을 사랑하고, 집념이 강한 아이로 키운

그런 부모가 어찌 무너지겠냐고.


모진 풍파를 맞고 있던 젊은 가장

힘겹게 삶을 지탱하고 있던 어린 어미

뜨겁게 독려하셨다.




칡흙 같이 막막했던 날들이었다.

악몽과 공포에 휘감기며

빛이 보이지 않는 해저 어딘가로 잠식되 듯

가라 앉고있는 나날들이었다.


그런 우리 가정에

아무도 손 잡아주지 않는 세상에

가장 따뜻한 손길이었다.

가장 눈부신 빛이 내려왔다.


고작

아이 음악 학원비가?


아니, 우리에겐

차디 찬 이 세상에

다시 부딪혀 보겠노라

일어서게 한 천금이었다.


우린 일어나야만 했던 부모였다.

피아노와 행복해하는 자식들이 있으니.




그러고 1개월 뒤

업계를 떠날 준비를 했던 신랑은

기적과 같은 재취업 소식을 가져왔고,


5개월이 지난 얼마 전,

그동안의 레슨비 봉투를 들고 학원을 찾아갔다.


당연히

돈을 안 받으시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보답하고 싶었고,

보답해야만 했다.


나와 원장님의

눈물, 위로, 감사, 감동

그리고 그 따뜻했던 그 분위기까지


내 아이가 보고있을것이기에.

느낄 것이기에.

그 천금 같은 돈봉투를 건냈다.


그 레슨비를

안 갚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식에게

그리고 부모인 나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았던


가장 강인하게 내 새끼를 키워낸
한 어미의 하늘같은 자존감이라고.


도움을 힘껏 받을 수 있는 마음의 빚도,

그 은혜를 꼭 갚아내는 마음의 빛도,

모두, 부모가 되는 길이었나보다.


덕분에
터널을 지나왔습니다.


내 아이의 마음을 지켜주신 은혜

주저 않은 우리를 믿어주신 위로

잊지 않겠습니다.


어떤 모진 풍파에도

살아낼거고,

눈물만 가득 했던 날에 찾아온

가장 가슴 벅찬 빛이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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