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아이 둘을 데리고 잔 날
내 인생엔
3명의 아버지가 있다.
평생 사장만 해오신
황소 고집쟁이 경상도 사나이,
친정아버지
최강의 자존감을 탑재하신
가정과 자식 밖에 모르는
헌신의 아이콘,
시아버지
그리고 마지막 아버지..
뭐랄까.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그분.
내 아이의 아버지,
바로 내 남편이다.
흔히들
남편들을 두고 '남의 편'이고 말하지만
내 남편은 그 정도로 '남의 편'은 아니다.
그렇다고
딱히 내 편도 아니다.
난
결혼생활 11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이 둘의 육아를 도맡아 했다.
어미 손만 잡는 두 아이
식당에서는 늘 내 옆자리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지며
11년을 아이들와 함께
잠자리를 하고 있다.
여전히 육아는
나의 전담이다.
그래도
신혼시절에 아기띠를 매고
유모차를 끌었던 신랑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이 나지만
그리 선명하지 않다.
아마
너무나도 찰나의 순간이었거나
화석이 되어버린 오랜 추억이어서
그런게 아닐까 싶다.
신혼 때는
육아 분담 문제로
남편과 수도 없이 싸웠다.
평생을 누군가와 투닥거려본 적이 없는
순한 사람들이었던 신랑과 나이지만
처음 마주한 육아의 세계는
고강도의 정신적, 육체적 노동을 요하는
전쟁터와도 같았기에
신랑의 육아 참여를
필사적으로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강제로 신랑에게 애를 맡겨도
너무나도 서툰 솜씨에 얼마안가
아이를 내품으로 데려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육아는
나의 차지가 되어가던
어느 날
정말 꼭 참석해야 했던
내 지인 결혼식이 주말에 잡혔다.
아직 돌이 지나지 않은
첫째를 결혼식장에 데려갈 수가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신랑에게 맡기고 외출을 해야 했다.
젖병, 수건, 기저귀를 세팅해놓고
아이에 대해 여러 가지를 당부한 채
집을 나셨다.
불안한 마음에 2시간 만에
다급히 집으로 돌아왔는데
세상에...
현관문을 연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는 첫째를 안아서 달래고 있는
신랑의 윗옷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100킬로가 넘는 거구의 몸으로
10킬로도 되지 않는 갓난아이를
바위처럼 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가방을 벗어던지고
얼른 첫째를 받아 울음을 달래 주었다.
신랑은 그길로 너덜거리며
안방 침대에 쓰러졌고
곧바로 잠이 들었다.
아이도 정장차림의 내 품에서
꺽꺽 소리가 잦아지더니
금세 잠이 들었다.
꿈나라 급행 열차를 탄 두남자 덕에
고요해진 집안을 둘러보는데
2시간의 치열했던 고군분투가
비디오처럼 그려졌다.
쏟아진 분유통,
엎질러진 물,
여기저기 흩어진 장난감들,
분유가 채 풀어지지도 않은 젖병,
그리고
거꾸로 채워진 아이 기저귀까지.
두 남자가
얼마나 전쟁을 치뤘을지
안봐도 알것 같았다.
그동안의 남편 육아회피는
핑계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것이었구나 싶었다.
50킬로도 안 되는 말라깽이 나는
10킬로의 아이를 하루 종일도
거뜬히 안고 있을 수 있었다.
나보다 2배나 더 나가는 신랑에게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줄은 몰랐다.
내게 거뜬한 일이라고
상대방에도 거뜬한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꿈나라를 헤매는 두 남자를 보니
짠한 마음과
동시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당신도 아버지는 아버지였네.
악을 쓰며 우는 아이를 내려놓거나
빨리오라고 전화를 해댔을 수도 있었을 텐데
진땀을 쏟아내며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던 신랑이 참 기특했다.
그날
난 그걸로 됐었다.
사실
내가 싸워서라도 얻고 싶었던 건
내 팔을 쉬게 해달라거나,
내 허리에서 아이를 데려가 달라는 말이 아니었다.
그저
함께 하고 있는 느낌.
아이는 하루 종일도 혼자 안을 수 있지만
마음이 혼자 인건 너무 외로운 일이었으니까.
잠자는 남편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육아니 분담이니
지지고 볶고 싸웠던 세월이 지나
어느새 두 아이는
초등학생으로 훌쩍 자랐다.
그리고 며칠 전,
문뜩 두 아이가 아빠와 함께 자겠다며
막무가내로 남편 침대를 점령하고 있다.
며칠째 3명의 부자, 부녀가
무릎을 부딪히며 함께 자고 있다.
내가 무릎 부딪히며
아이들과 잠자리를 도맡아 한지
11년 만에 처음이다.
11년 만에
육. 아. 분. 담. 을 하는 중이다.
갑작스럽게 내 곁을 떠난
아이들의 빈 잠자리가 어색하고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남편 잠자리를
불편하게 할까 걱정이 되었지만
웬일인지 남편은 괜찮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불편한 내색을 감추는게 아닌가.
내가 아는 남편이 맞나 싶었다.
불편하다며 나에게 아이들을
대번 돌려보냈어도 진작에 그랬을텐데
그러지 않고
함께 누워
원래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깔깔거리며
그렇게 오랜 시간
잠자리 육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이들에게
엄마라는 편향된 육아를 하는게
늘 마음이 쓰였었는데
아빠라는 존재를
가장 편안한 잠자리에서
느끼게 할 수 있다는게
너무나 감사한 순간이었다.
이유가 뭐 중요한가.
설명이 뭐 필요한가.
아버지라는 사람이
아이를 사랑하고 있는 중인데.
자기 새끼를 육아하겠다고 하는데.
내가 어찌
나 혼자서
애를 다 키웠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랬다면
아빠의 잠자리로 달려가
아빠를 만끽하는 아이나
불편을 감내하는 그의 아버지가
이토록 자연스러울리가 없겠지.
“당신은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아버지이자
사랑을 주는 아버지임이 틀림없네요.
난 덕분에
옆방에서 넘어오는
행복한 재잘거림을 들으며
낭독노동을 해야 할 시간에
이렇게 글을 쓰는 호사를 누리고 있네요. “
고마워요,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