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하 피아노
금요일 오후 당근마켓의 알림이 울렸다.
야마하 피아노, CLP735. 130만 원.
손목 아이워치에 뜬 그 문구를 본 어미는 오늘이 그날임을 직감했다. 6개월 동안 첫째 아이에게 들볶였던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의 날임을.
쥐고 있던 청소기를 내팽겨 치고 빛의 속도로 판매자에게 채팅을 날린다.
'오늘 구매하고 싶어요'
판매자는 업로드 한지 1분이 채 안된 130만짜리 피아노를 팔 수 있게 되었다. 바로 답변이 왔다.
'오후 6시 이후로 가능해요.'
당근 거래로 40만 원짜리 세탁기는사보았지만,
100만 원이 넘는 거래는 처음이다.
하지만 구매 결정은 이미 1년 전부터 대기상태였기에 130만 원짜리 피아노는 마트에서 우유를 사는 것만큼 빠르게 진행되었다.
체르니 50과 베토벤을 배우고 있는 첫째 아이의 피아노는 커즈와일이라는 국산 50만 원대의 저렴한 입문용이다. 5년 동안 단 하루도 건반이 눌리지 않는 날이 없었을 만큼 아이에게 피아노는 최애 장난감이자 학습도구였다.
메인보드를 한번 갈았고,
몇 달 전 페달도 새것으로 교체했다.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맞은 노랗게 변색된 건반 몇 개는 주저앉아 있고,
라캄넬라와 같은 고급 연주곡은
손가락을 최대치로 뻗어도 닿지 않는 음계를 동시다발적으로 치느라 저렴한 플라스틱 건반의 딸깍거림 소음이 요란하게 난다.
악기를 알지 못하는 어미 귀에도 그 소음은 거슬렸지만 아이가 갖고싶어하는 물질을 바로 채워주지 않는다. 물론 몇 달 치의 생활비를 한 번에 결제할 여유도 없었다.
휴대폰과 게임기를 사달라고 할 나이에
베토벤을 배우는 아이가 필요하다고 하는 피아노를
왜 안 사주고 싶었겠는가.
마음은 낙원상가로 달려가고 있었고,
6개월 할부면 기꺼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가장 쉽게 가장 빨리 해결할 수 있는 돈의 수단을 맛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성실로 점철되지 않은 채 쉽게 취득되는 것은 없다는 것을 교육하고 싶었다.
기다림이든,
티끌을 모으든,
갈망이 만들어내는 치밀한 계획이든
몸소 배우게 해야 했다.
그래서 6개월 전,
아이와 피아노 구매 계획과 원칙을 세웠다.
1. 최대한 중고피아노 매물이 나오기를 기다리기
2. 매달 20만 원(어미) 저금하기
3. 어른들께 받은 용돈 안 쓰고 모으기
4. 야마하 clp 7시리즈 이상급으로 사기
(기다림에 지쳐 저가 야마하 피아노로 타협하지 않기)
호기롭게 세운 계획이지만,
매일 매 순간 새 피아노에 대한 갈망으로 아이는 괴로워했다.
아이는 당근 마켓을 매일 검색하였고,
중고 매물이 없으면 네이버 최저가를 확인하였다.
그렇게 6개월을 기다리는 동안
내 피아노 적금 통장에는 120만 원과
아이의 용돈 30만 원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중고 매물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새 제품을 사기에는 아직 절반밖에 안 되는 금액이었다.
그렇게 지루한 기다림에 지쳐있던 그날,
어미와 아이에게 선물 같은 매물이 찾아온 것이다.
발 빠르게 용달업체를 3군데 컨택하여 최저가 배차를 받고, 신랑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픽업시간을 협의했다.
(옮기는 인력 한 명 값을 알뜰하게 절약하기 위해)
6시의 첫 채팅을 시작으로
밤 9시에 드디어 우리 집 거실벽 중앙에
야마하 7시리즈가 안착했다.
매물은 매장에서 온 것처럼
아주 작은 흠집도 없는 새것에 가까웠다.
300만 원짜리의 고급 사양의 야마하 피아노의 자태는 이 어미 눈에도 영롱하였다.
드디어 첫 연주.
첫 건반을 누르는 아이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설렘과 환희가 번졌고 그것을 보는 어미의 마음도 행복이 차올랐다.
첫 연주를 마친 아이는 상기된 얼굴로
꿈꾸는 것 같다고 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이 순간을.
어린아이에게 그 기다림이 얼마나 모질었을까.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어미가 얼마나 야속했을까.
하지만 아이는 보고 느꼈을 것이다.
매물을 확인한 순간부터 시작된 숨 가빴던 구매의 과정과 그 속에서 수없이 오가는 협의와 진척들.
100만원의 돈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소비를 참아야 했었는지를.
한 번의 터치로 수천만 원도 결제되고,
클릭 한 번에 다음날 내앞으로 배송되는 세상이
아이들 눈에는 도깨비방망이처럼 어려울 게 없어 보일 것이다.
그 속에 수많은 사람들의 피땀과
수십 년의 걸쳐 일군
누군가의 거대 시스템이 존재하는지 모른 체.
그 세상에 태어난 나의 아이들이
행여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을
쉽게 포기해 버릴까
염려한 어미의 교육이었다.
기다린 만큼,
절실했던 만큼,
이 피아노는 아이들에게
최고의 보물이 되었다.
먼지 한톨 없이 닦고 털고,
눈뜨고 가장 먼저,
눈감기 가장 마지막까지
피아노 앞을 떠나지 못한다.
우리 집은 아침저녁으로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가 멈추지 않는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고급사양의 음색은
‘음알못’ 어머의 귀를 호강시킨다.
아이는 마치 모짜르트가 된듯 연주하며
"엄마, 피아노 학원에 있는 그랜드 피아노 보다 더 좋아"라며 아이의 행복감도 온 집안을 따뜻하게 물들인다.
모질게
때를 기다리라고만 했던 어미를
수없이 안아주며 속삭인다.
엄마, 정말 고마워.
너무 행복해.
엄마가 더 고맙다, 보드라운 아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