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배의 평안시대

누구에게나 평안한 시간이 필요하다

병가를 내고 병원을 오가다보니 학교에 콕 박혀 있을 때보다 틈새를 사용할 시간이 난다. 그동안 해야지 해야지 맘만 먹은 채 1년 여의 세월이 흐르고 만 프리미엄 세차를 받으러 갔다. 하계역 쪽 홈플러스에 갔는데, 왁싱에 에어컨 필터까지 갈려고 하니 큰 돈이었다...만, 내 차에게 너무 미안해서 과감하게 질렀다. 우리학교 주차장은 지붕이 없어서 사시사철 다양한 기상변화를 온몸으로 겪은 나의 차에게 이 정도 호사는 누리게 해주어야지. 차를 맡겨두고 그 시간동안 뭘할까 하다가 북서울미술관으로 갔다. 입장료가 아예 사라진 거 같아서 일단 기분이 좋았다. 특별전 이름이 '이건희'였다. 어느틈에 예술 애호가로 자리매김한 이건희. 예전에 유홍준씨가 재벌에게 좋은 집을 짓도록 허가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하더니, 이건희 덕분에 좋은 작품들을 저렴하게 볼 수 있으니 이 아니 좋을쏘냐. 야구장에서 대기업 이름을 연호할 때 느끼던 그런 위화감은 좀 있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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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미술관에 가면 우리나라의 큐레이션 능력에 감탄할 때가 많다. 유럽 미술관에 가면 항상 그들이 부러웠는데, 이젠 와서 좀 배우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다. 작가별로 작은 방을 세심하게 꾸며두어서 방 안에 들어가면 온전히 그 사람의 작품세계로 몰입할 수 있게 돕고 있었다.

강요배, 허공과 나무

첫번째 방이 강요배 전시실이었다.

강요배. 하면 떠오르는 4.3, 민중, 투쟁, 불꽃, 한라산... 을 기대하고 들어간 곳에는 고요한 자유가 가득했다. 제주의 자연.이라고 이름붙이기에도 무리가 있을만큼, 더없이 개인의 내면으로 침잠한 그림들이었다. 세상에, 강요배도 이런 작품들을 그렸구나!

감탄해 마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허공과 나무>라는 작품 앞에서 한동안 서성였다. 새로운 일들이 갑자기 휘몰아쳐 아직 현실감각조차 깨어나지 않은 나에게 침착하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냥 들여다보고, 순서에 따라 걸어가다보면, 나에게 주어진 길을 또 발견할 수 있을 거야.


<백련>이라는 작품은 정말, 그 색감이 너무 좋았다. 세상을 밝히려는 듯 소담한 꽃봉우리가 너무 아름다웠다. 더불어 수줍게 연분홍빛을 피운 <홍매>도 화가가 그 그림을 그리면서 얼마나 설레게 아름다움을 느꼈는지가 나에게 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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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배, <백련>과 <홍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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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배의 <담일>과 <총석>

자연을 느끼지 않고 그리는 것을 불신하는 강요배의 설명이 붙은 <담일>

"담일은 흐린 날 하늘의 풍경을 담고 있다. 앙상하게 꺾인 멀구슬나무의 가지 사이로 흐린 날이어야만 윤곽이 뚜렷하게 보이는 해가 살포시 고개를 내밀었다. 나뭇가지의 거친 질감과 그 속에서 부드럽게 피어오른 해의 모습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작품이다."(작품 해설)


"그림의 획과 속도는 매우 중요하다. 나는 쉭쉭하고 소리나게 선이 그어지지 않으면 그림이 안그려지는 것 같다. 속도가 있어야 하고 선들이 다 벡터를 가져야 하고 강약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을 만지고, 자연 속에 살아 봐야 그런 선이 나온다는 거다. 디지털 이미지나 사진 등 인간이 가공해 놓은 이미지로부터 출발하면 획이 나올 수 없다. 이 차이는 매우 크다." (강요배, 2013)


얼마전 존경하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디지털화되거나 AI를 빌려 만들어낸 그림들을 일갈하던 영상이 기억난다. (그러고보니,, 그 전시회도 얼리버드로 구매해놨는데, 병가내면 가야겠다.)

<총석>이라는 작품의 바다 물거품은 나에게까지 끼쳐오는 느낌이다. 전시실 전체가 너무 고요하고 관조적이어서, 나 자신까지 가만히 그림을 거쳐 내 안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강요배의 이런 작품들만 잔뜩 모아서 상설전시관 하나쯤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제주 도립미술관은 대체 뭘하는 걸까.

한겨울 무밭에 엎드려 제주의 바람을 찍던 사진가 김영갑과 함께, 정말 소중하고 소중한 예술가다.

https://www.yna.co.kr/view/AKR20220827033900005 많이 늙으셨다...


강요배라는 화가가 이런 그림을 그린 시기가 궁금해졌다. 대략 2002년에서 2007년.

아. 노무현 대통령의 시대였구나. 그래도 우리가 희망을 현실로 가졌던 그 시절.

강요배도 한시름 놓고 세상보다는 자신의 삶에 눈길을 줄 수 있었던 걸까. 제주의 자연이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 속을 통과하고 있다. 벌써 20년 전. 강요배가 50대 일때 그림이다.

나의 50대도 그런 시간이 될 수 있을까.

집에 오니 구례로 내려간 건학이 직접 기른 감자가 도착해 있었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뭐라도 하나 해줄까 고민들을 하는갑다. 서울내기 건학의 첫 작품인 감자를 이렇게 많이 내가 먹어버려도 되는걸까? 좋은 음식 만들어 나누어 먹어야겠다.


삶은 늘 변화무쌍하고, 그 속에서 나는 또 살아간다. 그래서 재미지다. MRI도 잘 찍고 와야겠다.


강요배의 평안한 그림이 나의 마음도 평안하게 해주었다. 당분간, 이 평안을 나의 시간으로 받아들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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