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역사책들을 골라 내다
2023년 10월에 이사했으니 이제 거의 2년이 채워졌다. 이사를 핑계로 아이들 동화책이랑 내 역사책들을 몇백권 버리고, 앞으로 읽을 책이랑 평생 가지고 있으며 지침으로(표지만으로도 지침이 되은) 책만 남겼다. 책장도 몽창 버리고, 거실에 두었던 책장들은 남편방과 내 방(20년만에 다시 가진 내 방!)에 나누어 넣었다. 드디어 거실이 깔끔해졌다. 책장이 가렸던 벽이 드러나자 드디어 그림 걸 공간이 생겨났다. 내게 할당된 책장은 딱 4개. 종량제처럼 책장 공간을 넘지 않도록 책 관리를 하기로 해서, 읽고 나서 니눔으로 내놓은 책도 많았는데 어쩐 일인지 넘치기 시작했다.
역사교육적으로 의미 있는 책들이나 유명한 저자들이 개정판을 낸 후 선물받은 책들은 왠지 아까워서 버릴 수가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다 뽑아냈다. 이름하여 마지막 역사책 정리. 교사일을 그만두면서 1차 정리, 베트남으로 떠나면서 2차 정리, 이곳으로 이사하면서 3차 정리, 드디어 이번엔 마지막 정리
3차 정리에서도 살아남은 역사책들이 죄다 뽑혀나왔다. 너무 새책이라 버리기 아까운 선물받은 책들도 다 뽑혔다. 우리학교 역사샘들에게 1차로 가지고 싶은 책을 물어 따로 챙겨두었다. 아직 젊은 교사들이라 책 둘 공간이 마땅치 않아 정선에 정선을 거쳐 골랐다. 음.. 책을 둘 자리가 없어 점점 큰 집을 사게되는 게 우리네 역사교사들의 인생이지. 그리고 남은 책은 미련을 없애고 처분해야지.
이번에도 살아남은 컬렉션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결국 이전 정리들에서도 살아남았던 것들. 거기에 몇몇 작가나 학자들의 책이 얹혔다.
역사를 공부하고 역사 관련 일을 하는 동안 나의 깊고 긴 노력과 시간을 투자했던 것은 역시나 국가폭력과 전쟁. 어제 대통령이 한일회담 후 연설에서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재일동포에게 사과하는 부분이 너무 감동적이었다. 개인의 삶은 그 무엇의 가치보다 우선한다.
역사를 가르치면서도, 늘 "교육"에 대한 나의 생각을 형성하는 것이 더 절실했던 내게 프레이리, 코졸, 지루, 랑시에르, 비에스타는 적절한 시기마다 좋은 표지석이었다. 가끔 책꽂이의 제목과 저자들의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를 돌아보게 하는 책들이다.
언제부턴가 소설을 읽지 않는다. 김소진과 김소진이 죽고나서는 한강 뿐. 그들의 문장을 읽는 건 늪에 빠진 나를 구하는 방법 중 하나.
초딩때 대한극장에서 마지막 황제를 보고 푹 빠져버린 사카모토 류이치. 죽음을 앞둔 그가 쓴 책들은 지금 나에게 큰 가르침을 쥰다. 물론 음악도 그렇다. 대학교때 알바한 돈으로 cd 플레이어를 사고나서는 오랜 세월 새로 산 씨디의 비닐 포장을 벗겨내는 기쁨을 위해 월급날을 기다렸다. 지금은 가만히 꽂혀 바깥공기 쐬기 어려운 녀석들이지만, 20대때부터 내 음악 편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요즘은 둘째 아들과 음악 이야기헐 때 잠깐씩 보여주는 용도로 사용하곤 한다. 아들과 공유할 가수와 노래가 있다는 게 놀랍고 기쁘다.
몇년 전 아들들의 동화책을 정리하여 나눠준 적이 있다. 내가 오히려 아끼는 책들도 많았는데, 다 나눠주었다. 앤서니 브라운이나 병관이 시리즈 같은 건 진짜 아까웠는데.ㅎ
큰아들과 작은 아들이 4살 정도부터 10살 정도까지 곁에 두고 닳도록(리터럴리, 닳도록)보던 책 두권씩을 남겨두었다.
곤충과 바다와 모험을 좋아하던 큰녀석은 10대가 된 후 다양한 만화책의 세계로 갔다. 모험 가득한 10대 후반을 보내던 아들은 이제 어엿한 독립을 이루어낸 노동자가 되었다.
공룡 이름과 특징을 열심히 외우고 자연사박물관을 좋아하던 둘째는 한자를 알게되면서 상형문자를 직접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 녀석은 10대가 되면서 명탐정 코난과 짱구, 미야자키 하야오에 몰입했다. 요즘 일본대학 진학을 준비 중인데, 한자 때문에 고전하고 있다.
아이들이 자라는 건 기적의 일종인 거 같다.
이제 나의 덕질은 우치다 센세를 향하고 있다. 나의 음악이나 책, 영화 취향은 종잡을 수가 없다. 대학원을 안가길 잘했지, 갔으면 한우물 연구에 숨막혀 애저녁에 포기했거나, 한우물 파면서 재미없는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좋다. 다이내믹 중구난방 나의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