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후 2달을 다 채워간다

루틴을 지키는 삶

11월 17일이다. 9월30일에 수술을 받았으니 이제 1달 보름 정도 지났다. 많이 쉬고 푹 쉬고 무조건 편안한 게 우선이라는 2달이 거의 다 지나간다


수술받고 보류했던 나의 루틴이 서서히 회복되어 간다. 아들도 EJU와 수능을 모두 치렀다. 이제 12월 도쿄에서 면접만 보면 된다. 그 이후 결과는 이제 오롯이 아들의 선택과 책임에 따를 것이다.


루틴을 대략 기록해둔다.


07시 일어나기

아침은 과일과 채소, 단백질 조금으로 구성한다. 몸을 깨워 하루를 시작하는 중요한 한끼이므로 파이토케미컬과 식이섬유, 단백질로 하루 바탕을 깔아둔다. 요즘은 날이 추워 따뜻하게 수프를 베이스로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익혀둔 채소들을 갈아 데우기만 하면 되니 어려울 건 없다. 수프에는 역시 빵이 어울리는데, 잘 사다두지 않아서 그냥 통밀 토르티야를 바짝 구워 찍어먹는다.

9시정도부터는 음악을 틀어둔다. 요즘은 특정 앨범이나 곡을 고르지 않고 스포티파이의 데이리스트를 선택하는데, 많이 듣는 피아노연주곡들을 다양한 연주자의 앨범에서 골라주니 참 좋다.


음악을 틀어두고는 일단 내던져두었던 일본어 공부를 한다. 원래는 수술 후 2달 바짝 공부해서 12월초 N2 시험을 보려했는데, 과욕이었다. 수술 후 한달 동안은 거의 공부란 걸 하기 어려웠고, 인제서야 겨우 수술 전 꾸준히 했던 문형공부를 다시 잡았다. 베트남 가기 전 순창, 재우샘이 함께 선물해주었던 만년필을 다시 꺼냈다. 역시 일본어는 만년필로 써야 간지가 산다.


커피도 코르티솔 수치를 감안해10시쯤 한잔 마신다. 좋아하던 진한 커피에서 따뜻한 우유를 섞은 연한 커피로 바꿨다.

그리고는 내맘대로 그림을 그린다. 문화센터 수채화강좌를 들었었는데, 수술 후 1시간 이상 활동하는 게 힘들어서 내리 3회를 빠졌더니 따라가기가 힘들어져서, 그냥 그만두었다. 기본기를 익히고 멋진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는, 그냥 내가 천천히 내멋대로, 나 혼자 감상용으로 그려볼 작정이다. 누군가에게 배운다는 것은 머든 제멋대로인 나같은 사람에게 참 힘든 일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고요한 응시의 시간을 즐기는 쪽에 가치를 두기로 했다.

그림은 천천히 진행해야 하는 일이다. 나는 성미가 급해 얼른 무엇이든 해치워버리려는 나쁜 버릇이 있다. 이 성미를 고치려 일부러 천천히 하고 있다.


대략 오후 12시30분쯤 되면 점심을 해먹는다. 제대로 된 점심을 만들어 먹으려 노력 중이다. 국이나 찌개도 끓이고 생선도 굽는다. 그릴 기능이 있는 전자렌지를 이용하면 간단하다. 가끔 파에야나 잡채, 두유메밀면을 이용한 들기름국수 같은 특별요리도 한다. 그날 기분과 재료에 따라 만드는데, 대략 준비시간은 30분~1시간, 먹는 시간은 10분 안팎이다. 요리 하는 걸 더 좋아하게 됐다. 인체의 기전을 바탕에 둔 건강을 위한 한상 차리기가 점심식사의 모토다.

오후엔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산책을 간다. 동네 한바퀴로도 지치고 머리가 핑 돌곤 하더니, 요즘은 2시간 이상 나다녀도 큰 무리가 없어서 성북동이나 혜화동 인근, 가끔 용무가 있으면 종로까지는 외출이 가능해졌다. 물론 3시간 정도 한에서 끝내는 게 좋다.

얼마전엔 학림에 원두를 사러 갔다가 마로니에 공원과 아르코미술관을 들렀고, 다다음날엔 창경궁으로 들어가 창덕궁으로 나오며 절정의 단풍을 즐겼다.

집에 돌아오면 좀 쉬다가 간식을 먹으며 책을 읽는다. 간식은 과일이나 집에서 대충 만든 빵. 친구 김이 보내준 황금사과와 후배 강이 보내준 햇 부사사과, 후배 이가 집 마당에서 따 보내준 단감이 정말 맛있어서 행복하다. 전자렌지로 대충 만든 고구마빵과 브라우니에는 히비스커스 한잔이 잘 어울린다.

책은 여전히 인체에 대한 것을 읽고 있다. 남궁인이 의사 본업에 어울리는 책을 썼는데, 해부학 책과 함께 읽으면 재밌고 이해가 잘된다. 최근 제미나이 6개월 무료 프로모션에 가입했는데, 관련해서 이해가 안가거나 궁금한 걸 물으면 아주 잘 대답해줘서 이해도가 더 올라갔다. 주식시장이 하도 난리라길래 궁금해져서 주식공부도 시작했는데, 주식 자체보다는 세계 경제가 작동하는 기제를 알 수 있어서 흥미롭게 보고 있다. 정작 투자는 아직 염도 못낸다. 도 없고.


해가 짧아져 6시 넘어 어둑해지면 jtbc뉴스를 보며 저녁을 먹는다. 소화력이 떨어져서 밥은 부담스럽고, 수제요거트에 와일드베리류와 견과류를 잔뜩 넣어 배고플까봐 과도한 한사발을 만들어 먹는다. 뉴스가 끝나면 이것저것(주로 넷플) 보면서 실내 자전거를 40분 타는데, 수술 후에는 제속도를 못내겠더니, 이젠 25까지 올려 20분은 쉬지않고 타게 되었다. 12월엔 필라테스 복귀해야지.


샤워하고나면 9시 정도가 되는데, 지난주부터 시작한 TalkMe를 이용한 일본어 말하기 연습 시간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건 좋아하지만 말은 잘 못하는(굳이 말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나의 한계를 일본어에서는 극복해보고 싶어서 시작했다. ai기반 프로그램인데, 내가 하는 말에 적절히 대화해주고 중요한 포인트도 짚어줘서 재밌고 유용하다.


10시쯤 아들이 오면 이것저것 대화를 하다가 11시가 되면 피곤하고 잠이 오기 시작한다. 갤럭시워치에게 고마워하고 있다. 늦게 자고 일찍 깨고 깊이 잠들지 못하던 내게, 암환자에게 꼭 필요한 규칙적이고 충분한 수면을 익히게 해준 데는 카이스트 연구원들이 개발했다는 워치 수면프로그램이 엄청난 기여를 해주었다. 잠을 푹자면 어떤 기분인지를 평생 처음 알게 해준 거 같다. 잠을 많이 자서 칭찬받은 것도 대한민국에서 모범생병을 앓으며 살아온 내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11시가 되면 블라인드와 커튼을 내리고 잔다. 아들도 그 시간부터는 잔소리에서 해방이다. 곧 성인인 니 인생이야 이제 내 알 바 아니다.


이렇게 하루가 저문다. 평안하고 평온하다. 가끔 나에게 암을 치유해주는 주력 호르몬인 옥시토신을 선물해주는 사람들도 만난다. 이렇게 평온한 마음은 처음이다. 늘 어떤 책임감을 짊어지고 살았고, 교육 현장에 있으면서는 늘 사기치는 기분으로 죄책감을 내려놓지 못하였다. 다 내려놓고 지내니 이토록 평안하다.


이 시간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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