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엑셀 표에다가 데이터를 입력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퇴근할 시간이 되었다.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며 표에다가 숫자를 집어넣느라 혹사시킨 내 눈은 평소보다 더 침침했다. 노안이 오면서 나는 사물을 명료하게 보겠다는 욕심을 버렸다. 활자는 가까이에서 봐도, 멀리 떼놓고 봐도 더이상 젊을 때만큼 선명하게 읽히지 않았다. 긴 글을 보면 글자들이 덩어리로 보여 몇 번을 읽어야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게 노안 탓인지 뇌가 늙은 탓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오늘처럼 유독 컴퓨터 화면을 오랫동안 쳐다본 날에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비닐로 한 겹 싸놓은 듯 흐릿하게 보였다. 어두운 거리로 나서자 사물이 뿌옇게 보이는 현상은 더 심해졌고 마스크를 쓰고 있자니 안경에 김까지 서려 한 치 앞을 보기 힘들 정도였다. 차가운 바람에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자동차로 걸어가 시동을 켜자 때마침 나를 위한 듯 유재하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안개 속에 싸인 길
잡힐 듯 말 듯 멀어져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
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네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갈까
아득하기만 한데
이끌려 가듯 떠나는 이는
제 갈길을 찾았네
손을 흔들며 떠나보낸 뒤
외로움만이 나를 감쌀 때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내가 대학생일 때 이 노래를 듣고 ‘어쩜 이리도 내 마음 같은지!’라고 공감하면서 무한 반복해서 들었던 기억이 났다. 30년이 넘은 지금에서도 노래 가사에 우울감이 증폭되는 걸 보면 요절한 가수의 박제된 풋풋한 목소리만큼이나 나의 방황도 포르말린 유리병 속에 갇힌 채 끝나지 않았던 듯하다. 이리 오래도록 내 갈 길을 찾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 앞으로도 찾지 못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래서 두려운 건지, 슬픈 건지 모를 일이다. 나도 부탁하고 싶다.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지금까지의 길은 다 아니었어라고, 그간의 판을 뒤엎고 마냥 앞으로만 질주해 나아갈 수 있는, 그런 길을 내어 달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