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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근수근 Jun 18. 2024

민영규, 강화학 최후의 풍경

 

○ 이건창·이건승 형제와 梅泉·石田 형제

○ 綺堂·汶園·耕齋의 만주 망명과 난곡

○ 友黨·恥齋, 그리고 이상설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     


 석전 황원이 기거하던 월곡 마을은 구례읍에서 십리 안팎의 가까운 거리로 마을 뒤에는 월곡저수지가 있었다. 1944년 2월 17일 새벽 75세의 석전은 그 저수지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석전은 언제나 파리한 얼굴에 쉽게 입을 열진 않았지만, 목소리는 굵고 낮았다.

 그의 맏형인 매천 황현이 죽을 때 “내가 꼭 죽어야 할 이유가 있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는 유서를 남겼다. “황은이 망극해서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저 분해서”라는 것이다. 그는 죽기 전에 영재 이건창의 무덤을 둘러보는 것을 마지막 한풀이로 삼았다. 서울에서 난곡 이건방을 찾고, 강화도 사골의 경재 이건창을 찾아 건평리에 있는 영재의 무덤 앞에 엎드리고 “죽어서 외롭다고 서러워 말 것이, 그대는 살아서도 혼자가 아니었던가” 라고 하였다.

 매천과 석전의 사라질뻔한 기록을 광주 최승효 씨가 <황매천 관계인사 문묵췌편>를 미래문화사에서 발행하였고 이 책은 지난날 강화학의 최후를 회상하게 한다.     


 영재 이건창은 궁핍한 생활에도 매화나무를 심었고 이 매화나무는 서울에서 강화로 갈 때도 귀하게 가져갔다. 이건창의 아우 이건상은 을사년(1905년)에 그 매화나무가 꽃이 만개하였다고 매천에게 알린다. 이미 이건창을 비롯해 많은 애국지사가 죽었고, 외아들과 문원 홍승원의 딸인 며느리도 죽었다. 경술년(1910년) 매천이 자결했다는 비보를 알리기 위해 이건방을 찾았지만 잠적하였다.     


 난곡은 그때 개경에서 이건승과 홍문원과 함께 만주망명을 위해 숨죽여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개경에서 만난 이들은 난곡과 왕원초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돌아오지 못할 북행 열차에 올랐다.

 이건승이 황종희의 <명이대방록>을 접한 것이 이때 개성에서 대기 할 때이다. 명나라가 망하고 황종희는 군왕, 국가, 신하, 법제 등에 대해서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명이대방록>이다. 이는 금지서목이 되었고 청말에 다시금 빛을 발해 황종희는 동양의 루소라고 일컫게 된다.

 이건승은 <국조명신록>을 통해 양명학의 계보인 그의 인물됨을 짐작하였고, 어렵게 <명이대방록>을 구하게 되었다. 이건승은 이 책을 읽고 많은 동감과 깨우침을 얻게 되었을 것이며 이와함께 고민을 얻게 되었다. 황종희는 치발을 하면서 까지도 강학에 힘썼으나 자신은 후학을 내버려두고 만주로 망명을 가기 때문이다.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먼저 와있는 기당 정원하와 만난다.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은 열흘 뒤에 만주로 넘어왔으며, 이듬해 수파 안효제가 압록강을 건넜다. 1914년 61세 홍문원, 1916년 67세 안효제, 1924년 67세 이건승, 1925년 72세 정기당이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건승 일행과 이회영 일행의 관계에서 오는 궁금증이 있다. 이 두 일행은 서로 얼기설기 세교가 얽혀있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으며 두 행차가 교차되는 순간 응당 거기엔 억제된 감정의 폭발이 있어야 하지만 그들의 기록에서는 함구되어 있다.

 이회영의 미망인으로부터 약간의 정보는 들을 수 있었으나 시원한 해답을 듣지 못했으며, <황매천 관계인사 문묵췌편>에서는 매천집의 간행을 대해 난곡과 석전의 의견이 갈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동학란으로 대표되는 농민의 반란을 이건승을 비롯해 양명학자인 강화학파는 용서하지 않았다. 시대가 요구하는 큰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반시대적이라는 지탄을 받지만 전통사회가 부딪친 현실사회의 모순을 뛰어 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그들은 갑오개혁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갑오개혁은 개화라는 논의의 필연적으로 귀결이 되며, 이는 일본의 강제적인 경술국치로 이어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발단은 단발령과 을미시해에서 나타나게 된다. 이건창과 황매천 형제의 맹우인 김창강은 청인모양의 변발을 하였다. 나라가 먹혀가는 와중에 상투를 자르는 것의 문제가 아니었다.      


 만주의 생활은 힘들었다. 망명간 이들은 풍토병에 걸렸으며, 문원 홍참판은 죽고 만다. 그들은 관을 살돈도 없을 만큼 곤궁하였고 의연금으로 홍문원의 고향으로 보낼 수 있었다. 이후 정기당과 이건승은 곤궁한 삶을 살다 다시 헤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집안은 계속해서 고관대작을 하였으며, 사회경제적으로 유력한 가문이었다. 홍문원은 진천에, 이건창은 강화에 많은 가산이 있었을 것이나 이들은 경술년(1910년) 급작스럽게 가산을 정리하였으며, 슬하의 손주들을 출가 시켰으며 이들 중에는 보재 이상설의 며느리로 들어가 러시아에서 이상설의 임종을 지켰다.     

 보재 이상설의 죽음은 살펴봐야 할 점이 있다. 그가 죽은 해가 1917년이라는 점, 보재가 쓴 기록을 모두 태우게 한 점, 가족관계와 소년시절의 배움의 길이 강화학의 전수로부터 비롯된 점이다.

 1917년은 러시아에서 왕조가 무너지고 노농혁명 정부가 들어섰으며, 이로 인해 광복군의 기지에 대한 교섭이 의미가 없어 졌다. 그리고 만주와 연해주에 소왕영이라고 부르는 한인들의 정착촌이 있었으며 이들은 강한 생명력으로 추운 땅을 개척하였다.

 동경대학교 인류학자는 조사보고서를 통해 이미 만주와 연해주에 많은 조선인이 있으며, 그리고 이러한 이주를 다섯 단계를 거쳐 설명한다. 그리고 일본군이 이 보고서를 중심으로l 파병하게 되었다.

 보재의 만년의 비극은 제정 러시아의 붕괴로 있었고 이를 보재의 죽음을 재촉하게 된다. 보재는 지역의 유력자들의 호응을 얻어 권업회를 발족하고 대한광복군을 선보하였지만 권업회는 해산되었고 권업신문은 폐간과 주요간부의 추방령을 받게 된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중국과의 흑룡강 주변의 국경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흑룡강상의 비극으로 인해 빈공간이 된 지역에 한인들 이주하면서 러시아는 이들을 관리하여 러시아 영토화 하려고 하였다.

 보재가 죽은 바로 그 해 가을 이동휘는 한국사회당대회를 열고 그 의장에 추대되었으며문창범이 전로한족중앙총회의 회장이 된다.      


 보재의 주변에 이동령이라는 이름이 자주 나온다. 이동령은 이회영과 함께 압록강은 넘나들었으며, 이들은 서전의숙과 신흥문과학교에 깊이 관여하였다. 1917년은 보재의 죽음 뿐 아니라 이회영은 북경에서 가족을 옮겼으며, 일제의 탄압이 더욱 심해졌다.

 “나라를 빼앗긴 것은 노론이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고 바위위에 새우 뛰듯, 그저 뛰어다닌 것은 소론이었다” 이 말의 출처를 상해 임시정부 요원인 해공 신익희일 것이라고 추측된다.     신익희의 신씨집안은 강화도의 정제두로부터 학문의 뿌리를 둔 유력한 강화학파이다. 그리고 몽양 여운형 등도 신씨와 가까웠으며 학문적 인연을 갖는다. 보재가 죽자 많은 이들이 그를 추모하였다.

 보재는 어린 시절 남촌에서 치세 이범세와 이회영의 아우 이시영 등과 함께 수학 하였으며, 이건창의 귀양길에 그 와의 전별을 아쉬워하며 보낸다. 결국 보재와 강화학파의 굳은 유대는 실로 보재가 나면서부터, 기당·문원·학산·연제 등에서 지워진 것이다. 남촌의 삼재동 중 하나로 추측되는 이범세는 십오세에 등과해 증보동국문헌비고를 편찬하였지만 어느날 돗자리를 짜는 노인이 되었다. 보재의 죽음은 이러한 모든 이들이 목 놓아 울게하였다. 이처럼 이들은 자신의 가산과 목숨을 바쳐 살았다.      


 일의 성패가 문제가 아니다. 동기의 순수성 여부가 문제일 따름이다. 왕양명의 가르침이었다. 질의 참됨만이 네가 갈길이다. 결과의 대소고하는 물을 바가 아니다. 보재의 문서를 모두 불태운것은 국내외의 동지를 지키기위함이다. 시작과 끝을 오직 진실과 양심에 호소했을뿐, 성패를 묻지 않는 강화학의 가르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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