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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근수근 Jun 24. 2024

기차의 출현과 수원의 변화


한동민수원을 걷는다-근대 수원 읽기기차의 출현과 수원의 변화수원박물관, 2012     

   

기차의 출현

 기차는 근대문명의 기호이자 전통적인 자연적 삶을 시간을 구속하는 일상으로의 변화를 상징하며 우리 곁으로 왔다. 1900년을 전후하여 전 세계적으로 부설된 철도는 세계자본주의의 팽창과 산업화를 보여 주는 대표적이 상징물이었다. 이는 근대적인 교통수단에 머물지 않고 ‘제국’의 위대함을 알리는 선전물이었으며, 이는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경부선은 1901년 기공되어 1905년 1월 1일을 기하여 영업을 시작하였다. 철도의 부설은 한국의 자본주의화·식민지화·산업화 도시화·근대화 등 중층적 변화와 연결되어 있다. 철도 부설로 인하여 기존의 전통적인 장시와는 거리를 두고있는 기차역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었다. 수원의 경우 전통적인 상권인 화성의 성안시장과 성밖시장에서 팔달산 서남쪽의 수원역을 중심으로 하는 역세권이 만들어 졌다.     


경부선과 수원 상권의 변화

 수원군 남부면 매산리는 1905년 이전까지 넓은 벌판에 비해 몇 가구 살지 않았던 한적한 마을이었으나 철도역이 신설된 이후에는 새롭게 각광받는 땅이 되었다. 경부선이 개통 뒤에는 수원역을 통해 다양한 문물이 오갔으며 이로 인해 전통적인 상권인 팔달문 주변의 쇠퇴를 야기됐다. 수원역 일대에는 서쪽으로는 권업모범장, 농림학교 등이 자리 잡았고 동쪽으로는 전통적인 남문상권을 향하여 일본인 농장, 동척사무소, 식산은행이 들어섰으며, 팔달산 근처로는 소학교, 신사 등이 들어서면서 일본인들의 상권으로 확대 되어갔다. 이와 함께 경기남부의 상권은 해남로라는 전통적인 교통의 요지에서 철도 수송이라는 편리성으로 인해 기존의 전통적인 상권인 안성장은 쇠퇴를 맞이하였고 오산, 병점, 평택 등이 상권이 급격한 성장을 이끌어 냈다.     


수여선과 수인선사통팔달의 수원을 만들다

 경부선 개통 이후 30년이 지난 1930년대 수원과 여주를 잇는 수여서, 수원과 인천을 잇는 수인선 이 부설되었다. 이로써 수원은 경기 남부를 동서남북으로 연결하는 철도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수여선은 협궤열차로 1930년 이천까지 개통되어 운행하고 1931년 여주까지 완공되었으며 정식정거장은 수원, 용인, 여주 3개 역이였으며, 간이역은 7개 역이었다. 기존 남문 상권과 가까웠던 본수원역은 해방이후 화성역으로 이름을 바꿔 수여선의 주요역으로 기능을 하였다. 수원에서 여주까지는 4시간 40분이 걸렸고 여객의 수송비중이 높았으며, 수원지역 학생들의 수학여행을 위해 활용되기도 하였으나 주로 여주, 이천, 용인 사람들이 수원장을 비롯해 수원을 왕래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해방이후 수여서는 영동고속도로의 부설로 인해 1972년 폐선되었다.

 협궤열차로 1937년 개통되어 정식운행에 들어간 수인선은 17개역을 통과하고 수원에서 출발하여 사리-원곡 등 지금의 안산연안을 따라 인천까지 이어졌으며, 일본 자본에 의한 조선수탈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수여선과 연결되어 경기남부의 미곡과 군자만 일대의 소금을 안정적으로 인천에 반출하고 일본제 상품을 내륙 깊숙이 판매할 수 있었다. 수인선은 해방이후 도로교통의 발전과 42번 국도가 포장되며 1977년 화물운행을 중단하였으며, 1980년대 수도권 개발과 전철이 대중화대면서 차츰 구간을 줄이다 1995년 폐선을 맞이하였다.

      

기차 통학생수원을 깨우다

 기차의 등장은 서울의 새로운 근대문물을 수원에 빠르게 날랐으며, 그 중심에는 통학생들이 있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도 수원을 비롯하여 기차역을 지나는 지역에는 만세시위 소식이 빠르게 전파되었다. 1917년에 수원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은 유대관계를 가지며 ‘수원학생친목회’가 조직되었으며, 1924년에는 총26명에서 1937년에는 300여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는 1930년대 후반 사립삼일학교, 공립농업학교 등이 설립 전 수원에 고등보통학교가 없어 많은 이들이 서울로 유학을 다녔기 때문이다. 이들은 수원에서 중요한 인적자원으로 이후 이들이 유학생이 되어 한국을 이끌어 갔던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특히 1920년대 혈복단과 구국민단의 조직과 활동도 이들 서울 유학생과 기차 통학생들이 주도한 것이다. 3·1운동 이후 각성된 청년학생들은 1920~1930년대 수원을 비롯한 경기 남부지역의 궁핍화와 연계되어 광범위한 운동을 펼쳤다. 해방 이후에도 통학생들의 역할은 ‘수원기차통학생회’ 등 지속되었다.     


기차 통학의 변화

 해방 이후 수원에서 서울로 유학하는 학생들이 늘었고 이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수재로 꼽히는 인물들이었다. 기차 통학은 연착되고, 화물차를 타는 등 육체적으로 고된 일이었고 제시간에 맞춰 수업을 맞추기도 쉽지 않았으며, 기차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곤 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통해 부족한 시대에 향학열을 올린 이들이 지금의 수원을 만들어 낸 것이다. 고등학교가 무시험 추천제로 바뀌고 1974년 기차가 수도권 전철로 바뀌면서 기차통학은 대학생들이 주요 고객이 되었고 서울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이 더욱 많아졌다. 1974년 경수선으로 수원에 전철이 개통되고 이로 인해 서울과의 접근성을 높아진 수원은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팽창을 가져왔다. 2000년대 들어와서는 KTX가 정차하고 천안까지 전철화되며 수원역 앞은 더욱 번성하게 되었다.     

수원역사의 변신

 1905년 전면 개통된 경부선의 수원역사는 단층의 일본풍 목조건물이었으나 점차 유동인구와 물돌양이 증가하면서 1928년 팔작지붕으로 한 겹처마의 건물로 한옥의 아름다움과 당당함으로 이름을 날린 명소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전쟁에 전소된 한옥식 수원역은 임시역사로 사용되다가 지역민의 열망으로도 불구하고 1961년 특색이 없는 무미건조한 일반 콘크리트 역사되었다.     


수원역 광장 

 1974년 전철이 개통된 뒤 세워진 수원역광장의 시계탑은 수원을 찾는 외지 사람들과 만날 때 사용되는 만남의 장소였으며 1972년에는 수원역 광장에는 장관을 보여주는 분수대가 있었다. 그리고 수원역 광장은 숱한 정치적 사건과 정치적 집회의 역사적 현장이었다. 그러나 2003년 민자역사가 문을 열면서 수원역광장이 사라졌다. 수원역은 무궁화호, 새마을호 등의 기차역과 수도권 전철역 그리고 이와 연계된 수원역 앞 버스노선 등으로 많은 이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어 수원역은 이제 백화점과 연계된 일상적 상업적 공간의 하나가 되었다. 수원역 광장자리로 현재의 교통섬은 경기도의 유관순으로 알려진 이선경 열사가 순국한 곳이나 현재는 꽃밭이 되어 가로막혀 있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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