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랑머리앤

닮고싶던 너에게

by 감성돼지 사복

내가 태어나 자라던 그 시절엔

수줍음에 감춘 마음이

누군가에게 양보처럼 보이던 때가 있었다.


‘당당함’이라는 단어는

지금 떠올려 보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시골에서 초등학교시절,

몇 명 안되는 친구들 틈에서

나는 수줍은 여자아이로 조용히 잘 어울려 지냈다.


집에서 학교까지 20분 거리.

작은 체구에 큰 가방을 멘

다리가 짧은 내가 걷기엔

그 길이 유난히 멀게만 느껴졌다.


하늘에 구름을 벗 삼아

상상의 나래를 달고

누군가의 집 안마당에 묶여있던

이름 모를 강아지가

반가움에 꼬리를 흔들면

내 손도 함께 흔들렸다.


민들레 홀씨를 후- 불며

함박 웃음을 짓고

그렇게 사계절을 묵묵히 보냈던 것 같다.


어느날, 조용한 나에게

동네 친구가 생일파티에 초대했다.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 설레었지만

바다 일로 바쁜 부모님께

읍내로 가서 선물을 사자고 말할 수 없었다.


선택지는 집 앞 바닷가


모래에 파묻힌 조개껍데기 중

구멍 난 것들을 열 개 남짓 찾아서는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었다.


선물상자는 엄마 팬티상자,

팬티 그림이 있어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안에 든 선물이 안전할 것이다.


드디어 초대 날,

여럿이 빙 둘러앉아

처음 보는 케이크에 초를 켜고

박수 속에서 빛나던 주인공은

행복하게 소원을 빌며 불을 껐다.


‘나도 한번쯤은….’

생일파티를 열어 케이크에 초를 꺼보는

아주 짧은 생각을 하고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하나둘 선물이 건네졌다.

장난감,문구용품…

저마다의 손이 반짝였다.


나만 아는 창피한 선물상자

그 안에서 나에게만 빛나던 선물,

하지만 그것을 열어본 친구의

실망한 표정 앞에서

나 역시 함께 작아졌다.


그 후로

나는 더 이상 그 친구의

생일파티에 초대받지 못했다.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다만 거절당하는 마음이 싫어

용기를 감춘 채 살아갔다.


지금처럼 만화 채널이

하루종일 나오지 않돈 그때,

평일 하루 한시간

운명처럼 한 아이를 만났다.


나와 묘하게 닮은

주근깨 가득한

빼빼마른 빨강머리 앤,


그 아이는

하고 싶은 말을 쉬지 않고 했고,

현실을 부정하지 않은 채

상상하며 꿈꾸며

당당하게 살아갔다.


그날 이후 알게 된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을

마음속에만 담아두면

아무도 모른다는 걸,


몰라주는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는 나 자신을 탓하는 대신,

입 밖으로 내뱉는 연습을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큰 소리로 웃었던 그때 그날,


용기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미움받을 용기는

모두에게 필요하다

앞으로 나아가게 하니까!


그래야

나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된다.


빨강머리앤 다이어리를 바라보며

모든것이 추억이다 말하며


지난날을 곱씹어 본다.


치열한 전쟁터에서

비겁하게 깃발을 흔들며 항복하지 않고

지금도 열심히 잘 싸우고 있는

내 자신에게 말한다.


살아줘서,

정말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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