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십백이 얼마에요?"
이런 질문을 들으면 화부터 난다. 이십백도 틀렸지만, 숫자는 숫자지 그걸 얼마냐고 물어보면 어떡하자는건가? 숫자는 얼마인지를 갸늠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인데, 이십백이 얼마냐고? 정말 순식간에 화딱지가 나버린다.
"이십백은 없어. 예전에 말했지. 숫자는 일십백천만 처럼 자리가 있어. 그 자리에 맞게 불러 줘야 해. 이십과 백 중에 어는 것이 더 크지?"
"이십이요"
"아닌데"
"(갑자기)스물이 뭐에요?"
"스물은 이십이야 스물이랑 백중에 어느게 더 크지?"
"음.. 백이요"
"그래, 그럼 큰 수를 먼저 읽어줘야 해."
"스물백"
(너무 답답해서 소리를 지르고 싶다. 하지만 참고)
"백이십이라고 해"
그렇게 아이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뛰어 건넌다.
이 이야기를 처음 했을꺼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최소 10번은 넘게 했던 대화다.
아이가 아직 백의 자리를 몰라서 그렇다. 이해가 안되는 듯하다. 100의 자리는 초등학교 2학년부터 배우긴하던데, 이게 그렇게 어려운 거 였구나 싶다.
그래도 지난 번에는 1부터 100까지 세보기도 했다. 물어볼때면 도와주기도 했는데, 어찌저찌해서 100까지 셌다. 그것만도 기특해서 더 바라지 않는데, 자꾸 숫자를 알고 싶은가 보다.
첫애와는 이런 시간이 없었던것 같이 느껴지는 것은 뭘까. 첫애도 백천 이라고 했었다. 그래도 이렇게 답답하진 않았는데, 우리 꼬부기랑은 정말 답답하다. 집이었으면 내 표정을 봤을텐데 다행이 밖에서 손을 잡고 걷고 있어서 내 표정이 들키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이번 고비는 잘 넘어갔는데, 답답하게 느끼게 하는 순간들이 수십번도 더 찾아온다. 그동안 잘 참으며 해냈으니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을꺼라 생각해보지만,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아이들을 키우는 게 도를 닦는 것보다 더 힘들고, 한시간 기도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
정말 내가 聖人성인이 된다면 모두 아이들을 키우면서 잘 참아냈기 때문에 된 것이다.
부모가 되는 게 이렇게 힘든 것이란 걸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아니, 그들은 어떻게 그리도 잘 해냈을까. 내가 고난에 너무나 과민하고 예민하고 약해빠진 사람처럼 반응하고 있는걸까.
나는 10년 동안 교육 일을 했었다. 아이들을 가르쳤었는데, 내 아이들에게는 왜 이렇게 안되지? 어제는 첫애와 영어공부를 하다가 앞으로 영어 공부 가르쳐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너 혼자 하고, 정 어려우면 학교 수업 뒤에 복습만 해주겠다고 했다. 올해부터 영어과목이 시작되어서 어느 정도 배우고 가야 해서 함께 공부 중이었는데, 어제는 더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아이에게도 엄마가 엄청 화가 나서 너와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는데, 아이는 그것을 모른다. 아이는 엄마가 왜 저러나 하면서 그냥 별 생각없어 보인다. 그냥 나혼자 열내고 화내고 미안하다 하고 그러고 있는 듯하다.
드라마를 보지 않는 이유가, 내 일상과 내 감정변화가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점점 우울증과 조울증, 사이코패스가 되어가다가 자신의 실체를 발견. 하지만,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실오라기같은 희망을 붙들고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다 조금씩 성장하여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을 담은 대하드라마 뺨치는 일일연속극이다. 아이들 뒷담화를 하지 않고서는 오늘도 버티기 힘들어서 여기에다가 좀 쏟아 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