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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날 Feb 23. 2022

제발.. 안전벨트와 운동화

우리 꼬부기와 관련하여 몇 년 동안 시달린 물건이 있다. 

바로 안전벨트와 운동화이다. 


사람들마다 아킬레스건이 있다. 우리 꼬부기만이 아니라 나도 아킬레스건이 있다. 


 형제와 부모를 만나게 되어도 지켜줘야 할 최소한의 선이 있고, 꺼내지 말아야 하는 얘기들이 하나씩은 꼭 있다. 이 얘기 꺼내면 싸우게 되고, 누군가 감정 폭발할 것이라는 걸 아는 소재들이 있다. 

남편과도 그렇다. 늘 부딪히는 갈등 요소. 약한 부분. 그곳이 건드려지면 폭발해버린다.

그런데 남편하고 다툴 때는 그리 긴장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꼬부기의 아킬레스건이 건드려질 것 같으면 너무 긴장이 되고, 불안하여서 내가 무너져버릴 것 같다. 몇 년째 시달리다 보니 이제는 나에게도 병적인 반응들이 나타난다. 소리 지르는 것도 다 해보았지만, 바뀌지 않고 내 얘기가 통하지 않는 아이를 보면 큰 한숨을 쉬고, 우울감이 찾아오고, 그냥 다 포기하고 싶어졌다. 잦은 반복으로 지름길이 생겨서 그런지 짧은 순간에 이런 결론으로 직행해버린다. 


처음에는 그냥 아이가 어리니까, 우리 꼬부기가 느리니까 등의 이유로 이해해주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럼에도 이 문제로 아이가 폭발하려는 느낌이 들면 긴장이 되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조용히 기다리는 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게 없어서 두렵기까지 했다. 


안전벨트가 안 채워지면 폭발하며 소리 지르고 짜증내고 의자를 발로 차며 울고불고 생난리를 피운다. 

운동화가 잘 안 신겨져도 똑같이 신발을 벗어서 던지고 소리 지르며 짜증을 낸다. 


밖에 나갈 때마다 이 두 단계를 거치지 않을 수 없기에 외출할 때마다 갈등이 생긴다. 

차를 타고 가지 않을 때는 한 단계로 끝날 수 있어서 좋다. 

어떤 날들은 두 가지를 모두 잘 해낸다. 실은 잘 해내는 날들이 더 많을 것이다. 

어제는 잘했는데 오늘은 왜 갑자기 잘 안될까. 그래서 더 불안하다. 언제 터질지 몰라서. 


아이가 신발을 신고 있을 때 스스로 신으라 하고 기다려준다. 아이는 다 신은 신발도 느낌이 이상하다며 벗어서 던져버린다. 그리고 "어린이집에 안가!"하고 소리 지른다. 

그러면 '어린이집 가기 싫어서 또 그러는구나' 생각하면서 신발을 신겨준다. 

그래도 자꾸 벗어버린다. 바깥에서도 벗어버리고, 발이 이상하다며 짜증과 울음을 터뜨린다. 한번은 횡단보도에서 벗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운전자들이 차량에서 보고 있다 생각하니 더 창피해서 아이를 못 본 채 앞서 걸어갔다. 아이는 결국 신발을 들고, 빠르게 쫓아왔다. 


자주 반복되다 보니 놀이치료 선생님께 여쭈어 보았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아이가 예민해서 그런 거 같다고 하셨다. 그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했었기에 내가 그동안 아이를 이해해주지 못했구나 생각하며 배려해주려 노력했다. 아이만 느끼는 불편한 감각이 있나? 싶어서 아이가 이상해 라며 신발을 벗어던지면 

"불편하구나? 그래 , 느낌이 불편하지? 그래도 신어야 해." 라며 배운 대로 반응했다. 

그리고, 아이의 불편한 느낌에 많이 공감을 해주었다. 그런데, 그랬더니 그날부터 신발과 관련된 불편사항이 2배 이상 폭증했다. 

'왜지?' 

그다음 주에 놀이치료에 가서 선생님께 여쭈었다. 

갑자기 몇 주 사이에 신발로 갈등이 많이 늘어났어요

선생님은 너무 많이 받아줘서 그런 거라고 하셨다. 


선생님이 아이가 예민해서 그렇게 느낄 수 있다고 해서 받아줬던 건데 

너무 받아줘서 문제가 생겼다고 하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나 싶었다. 


나는 지혜가 부족했다. 자녀를 키우다 보면 지식으로만 안 되고, 지혜가 필요한 순간이 분초마다 생긴다. 어느 선까지 받아주고 어느 선에서는 받아주지 않고. 

정말 엄마는 참 힘들다. 반응 정도에 대한 매뉴얼을 만들어야 하는 것인가? AI가 나보다는 잘할 거 같다. 

아무튼 안 받아주기 시작했더니 아이의 신발 문제는 사라졌다. 정말 갑자기 갈등이 없어졌다. 


아이를 볼 때마다 힘들고 미스터리에 빠진다.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나는 아이를 정말 많이 좋아했다. 세상 모든 아이들이 다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꼬부기를 키우면서 바뀌었다. 더 이상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 꼬부기 한 명이 3명 아이를 키우는 것만큼 힘든 것 같았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지... 오직 부모이기에, 모성애와 부성애의 희생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로 인해 빛이 나는 것 같다. 캄캄하지만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누군가의 희생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희생의 발 뒤꿈치도 못 따라갈 정도이지만, 약간은 경험한 느낌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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