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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날 May 02. 2022

천 번을 흔들리려면 부모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부모가 된다. 결혼과 임신을 하게 되고, 아기를 출산하고 나면 비로소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된다. 

갑자기 그 역할이 주어진다. 내가 부모가 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 시험을 봐서 통과하지도 않았는데 엄마가 되어버린다. 자격미달일 수도 있는데.. 나도 자격미달상태로 부모가 되었다. 


아기를 좋아한다거나 아기를 싫어하거나

아이들과 잘 놀아주거나 아이들의 유치함을 싫어하거나 등등

여러가지 이유로 자신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어 또는  나는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으니 아이를 낳지 말아야지. 등의 생각들을 하곤 한다. 그런데, 나를 보아도 주변의 다른 엄마들을 보아도 이런 법칙같은 것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가지 예를 들고 싶은데 

첫번째 딩크족으로 결혼 8년차까지 세계일주를 하며 지내던 친구 부부가 아기를 갖게 되고선 아이를 위한 삶으로 바뀌었다. 아이를 위한 자신들의 삶과 희생에 기꺼이 수긍하게 되었는데, 자신들도 이렇게 변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또 다른 예,

연애시절 까페나 식당 옆자리에서 칭얼대며 시끄럽게 구는 아이들이 너무도 싫어서 경멸의 눈길을 주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던 남친/지금의 남편이 그녀에게 정나미가 떨어져서 결혼하지 말까 생각까지 했단다. 이 엄마는 일을 너무나 좋아하고 남편과의 연애가 좋았었기에 막연한 기대로 결혼하였으나 결혼하자마자 곧 아기가 생겨서 엄마가 되었단다. 그런데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 완전히 바뀌어 버렸단다. 지금은 아이들이 가장 소중하고 예쁘단다. 

이렇듯 주변에 변화된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모두들 큰 목표와 계획을 세우지 않고 결혼하고 임신하였는데 아기를 낳은 후 달라져버렸단다.

 

인생이라는 것이 이런거였구나. 부모라는게 이런거였구나 비로소 그때서야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한 아이를 맡아서 키운다는 것은 나의 시간과 나의 인생을 나누어 준다는 의미이고, 나누어 주는 정도를 넘어 모든 걸 주어야 할 수도 있다. 


나도 그런 계산은 하지 않았다. 공부 못하는 사람들 특징에 해당한다고 들었는데, 미리 계산해보고 예상해 보지 못했다. 나는 5가지 사랑의 언어 테스트에서도 봉사라는 사랑의 언어를 가지고 있어서 나의 남는 시간과 체력과 힘을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기를 갖고 싶었고, 아기를 위해 봉사하고 싶었다. 나의 부모님도 자녀들 뒷바라지를 일평생 낙으로 삼으셨는데 보고 배운게 나도 그런가 보다. 


 아기를 볼 때마다 너무 예뻐서 나도 저런 아기를 맡아서 종일 안아보고 싶었다. 그런 정도의 생각으로 나는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서 말이다. 서른 살의 나는 그정도 수준의 여자였다. 왜그렇게 간절히 아기를 원했을까? 아기가 나에게 주어지는 상처럼 생각되었다. 자랑하고 싶었다. 나도 엄마가 되었다고. 그냥 남들 하는 결혼과 임신과 출산이 나에게는 위대한 일처럼 생각되었고, 나도 모든 인류의 발자취를 뒤쫓아서 그런 과정을 밟았다는 것이 좋았고 기대가 되었다. 


너무 작은 아기의 손과 발을 만져보고 싶고, 아기를 한없이 안아주고 밥도 먹여주고 그런 모든 게 재미있을꺼라는 생각과 기대도 했었다. 어렸을 때 인형놀이를 하면서 인형의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를 빗겨주고 업어주고 하듯 아이를 키우는 것은 인형놀이처럼 재밌을꺼라 생각했다. 


그렇게 6년을 간절히 기다리다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는 세상의 모든 신비가 풀리는 듯했다. '아! 이거였어.'

이 세상의 모든 비밀은 깨닫게 되는 듯 했다. '인생에서 생명의 탄생이야말로 가장 신비로워. 생명이 이렇게 태어나고 나는 부모가 되고 늙어가고. 인생의 비밀은 이거였구나.' 


부모가 되니 내 마음이 달라졌어. 나의 부모님을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졌고 그들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왜 이렇게 아기를 향하여 불붙는 마음이 생겨날까. 아이가 왜 이렇게 내 인생에 소중해졌지? 나보다 더.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가 생기다니. 어떻게 내 마음이 이렇게 변화가 되었을까?

아기가 아프면 내가 아플 때와 비교되지 않은 긴장과 불안으로 아이를 돌보았다. '혹시 우리 애기가 아파서 잘못되면 난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없어. 절대 아이가 잘못되면 안돼.' 그런 생각으로 아이의 작은 신음소리에도 눈이 번쩍 떠지고, 밤이고 새벽이고 며칠 잠을 못잤건 상관없이 아기만을 위해 내 몸이 반응했었다. 

남편은 자다가 아이 우는 소리가 안들린다고 한다. 그래, 어찌보면 맞는 말이다. 내가 아기를 울 때까지 둔 적이 없으니까. 아이가 잉~하는 소리가 나기도 전에 약간의 짜증내는 듯한 외마디에도 나는 곧바로 일어나서 아이를 보살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을까?' 나도 내 자신이 신기하다. 내가 이렇게나 바뀔 수 있다니.


또 하나, 아기를 낳고 나서 나는 나의 부모님이 원하는 것이 아닌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살아왔다는 사실이 깨달아졌다. 부모님은 나를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자신의 인생을 우리에게 주며 살아오셨다. 하지만, 나는 그런 부모님의 사랑이 싫었고, 부담스러웠다. 부모는 영원히 짝사랑만 하고 있다. 

내 인생을 살고 싶어서 부모님이 원하는 공무원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아기를 낳고 나자 아빠의 소원인 공무원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공무원 시험이 슬슬 과열되기 시작했는데, 내가 제일 끔찍하게 생각했던 공무원이라는 일을 해서 아빠를 기쁘게 해드려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정도로 나를 바꿔놓았었다. 


임신하자마자 또는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갑자기 내 안에 스위치가 켜졌다. 모성애라는 스위치. 

그 전에는 없었던 마음이다. 갑자기 생겨났는데 그게 나의 전부를 뒤흔들만큼 컸다. 나는 엄마가 된 게 너무 좋았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니 마음이 아플 때가 많았다. 


그런데, 그 사랑스럽던 아기가 점점 자라며 어린이가 되고 말을 듣지 않는다. 이럴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정말 모르겠다.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어떻게 하셨지? 그냥 내가 하는 행동들이 다 부모님이 하던 것을 무의식중에 따라 하는거겠지?

금쪽같은 내새끼를 보고 또보고 공부하면서도 매순간 어떻게 내가 행동해야 하고 판단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답을 못찾을 때가 많다. 나의 감정에 따라 움직일 때가 많은 거 같다. 그러면서 점점 실수하고 잘못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우리 꼬부기가 심리적인 문제로 작업수행능력이 느린거라는 검사 결과가 나왔을 때 나는 엄마로써 불합격이란 통보를 받은 것만 같았다. 부모로써 아이의 보호막이 되어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게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여서 노력하고 희생했는데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오는거지? 

정말 모르겠고, 아이의 생떼가 7살이 되어서도 이어지자 나는 번아웃이 와버린거다. 야뇨증으로 매일 빨래를 하고, 아이의 떼쓰기로 힘겨루기를 하고 버릇을 고치기 위해 아이에게 강도높은 훈육을 하면서 지쳐버렸다. 

나는 뭔지 모르겠다. 왜 이러고 있는건지. 내가 잘하고 있는건지.. 

오은영박사님만 살짝 오셔서 내 삶을 지켜보고 말해주셨으면 좋겠다. 도대체 뭐가 문제여서 이렇게 힘들고 아이도 바뀌지 않고 힘에 부치는 건지. 


다들 엄마 역할이 힘들지요? 정말 묻고 싶다. 산고 끝에 죽음과 생명의 갈림길까지 갔다가 아기를 품에 안으니 모든 엄마들이 위대해 보였다. 그냥 모든 출산을 경험한 여자들에게 가서 당신을 존경한다고 말하고 싶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를 잘 양육하고, 아이와 좋은 관계를 맺어가고 있는 모든 엄마들이 위대해 보인다. 나는 이렇게 아이를 통해서 성장하고 있다. 비로소 알을 깨고 나와서 세상을 보게 되었고, 넓은 세상을 걸어보고, 날기도 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 같다. 인생은 더 오래 살아봐야 알 수 있을 꺼 같다.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책을 읽었다. 천 번을 흔들리려면 부모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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