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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날 Aug 01. 2022

언제 어른이 되나요?

어릴 적 보았던 어른들은 큰 산처럼 높고 든든해 보였다. 

그들은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할지 바로바로 알고 있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어린 나는 많은 시간 공상을 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간다며 투덜댔다. 나도 어서 어른이 되고 싶었고, 어른이 되면 저렇게 바쁘고 정확한 움직임들을 하게 될 거라 생각했다. 아이의 눈으로 봤기 때문에 처음부터 오류가 있었다는 걸 지금에서야 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아직도 어른이 되고 싶은 어른이다. 

나이가 들어서 나의 삶의 햇수는 쌓였지만, 예전보다 위기와 고난에 대처하는 능력이 좀 더 생기고 유연해졌지만, 여전히 실수투성이고 내 앞가림하기 바쁘다. 

만 스무 살이 되면 성인이 되었다고 하는데, 성인이 어른을 말하는 것일까? 그 나이가 되면 술집에 가서 술을 마음대로 먹어도 되고, 담배도 살 수 있고, 청불영화 보러 극장에 들어갈 수 있고 뭐든 제약이 없어진다. 

그런데, 그때도 어른이 아니다. 


30대가 되었을 때, 결혼을 했다. 30의 끝자락에 결혼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우리 엄마는 내 나이에 아이를 낳아 키우고 계셨는데, 나는 엄마보다 늦었구나.' 

옛 사진 속 엄마와 비교하면 나는 아직 어른이 안 돼있었고, '나는 언제 어른이 될까. 얼른 애를 낳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결혼을 했는데도 여전히 어른이 된 것 같지 않았다. 우리 둘 사이에 아기가 있다면 정말 좋겠다 하고 늘 아기 갖기만을 꿈꿨었다. 

36살에 첫 아이를 출산하면서 죽음의 문턱을 경험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고통과 죽을 것처럼 힘든 출산 과정에서 나는 이 상황을 얼른 끝내기 위해서도 안간힘을 다해서 아이를 낳아야겠다 생각했다. 

마지막 힘을 주란 말에 죽을힘을 다했는데 남편은 훗날 내가 힘을 주는 것을 보면서 무서웠다고 했다. 

나도 그때는 이러다 죽을 수 있겠다는 싶었다.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고 지치고 기운조차 없는데, 힘을 줘서 아이가 나오게 해야 했는데, 고비를 넘기자마자 나는 아이를 만나게 되었고, 그 때 약간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내가 돌봐주어야 할 새로운 생명체를 만나니 이제 어른의 모습이 갖춰진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 산후의 고통은 점점 잊혀가고 나는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갔다. 엄마가 되어서 아이를 돌보고 있어서 그것이 어른이 된 것이라 착각이 들기도 했지만. 

아이에게 필요한 영양소를 생각해서 음식을 만들고, 아이의 필요를 채워주며 옷을 입혀주고 보호해주면서 나는 아이에 비해서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되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잠 못 자며 밤새 아이를 간호할 때도 내가 예전의 엄마처럼 하고 있구나 하는 옛 기억들이 소환되며 비교가 되었다. 

아이가 위험한 행동을 할 때, "안돼!"라고 말하고, 아이를 혼내거나 할 때면  비로소 어른 같았다. 

아이에 비해 나는 어른이었지만 내 내면에는 여전히 어린아이가 있었다. 


둘째가 태어나고 나니 네 식구, 완전체가 된 느낌이었다. 든든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다 이루었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나도 '다 이루었노라'는 고백이 나왔다. 

내가 무언가를 창조할 수 없는 사람인데 나를 통해서 새로운 생명들이 이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이 참 신비롭고 위대하게 느껴졌다. 이 세상에 구성원으로서 나도 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점점 훈육을 해야 하는 상황이 많이 생겨나면서 규칙을 만들고, 질서를 세우기 위해 내가 먼저 솔선수범하느라 정말 어른 흉내를 많이 냈다. 어른처럼 말하고 어른처럼 행동했다. 

"싸우면 안 돼, 물건을 던지면 안 돼"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모범적으로 행동해야 했다. 


큰아이가 점점 더 자라서 초등학생이 되자 더 고차원의 훈육을 해야 했다. 인생을 이야기해야 할 때가 생겼고, 정치 사회를 이야기해야 했다. 꿈이 무엇인지 등의 고차원 대화를 나누면서 나의 말에 비해 허점 투성인 내가 보여서 부끄러웠다. 

나도 아이에게 모델이 되어 주기 위해서라도 이전과 다르게 행동하고 노력해야 했다. 그렇게 나도 조금씩 더 어른의 행동을 따르게 되었다. 


큰 바위 얼굴이라는 명작동화가 있다. 

마을의 자랑인 큰 바위에 새겨진 얼굴을 보면서 늘 저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을 닮고 싶어 했던 소년은 마을을 찾아오는 몇몇 성공한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얼굴과 그들의 삶에서 자신이 그려왔던 큰 바위 얼굴을 만나길 늘 꿈꿨다. 그러나 그들은 큰 바위 얼굴을 닮지 않았었고 그의 기대는 매번 깨졌다. 겉모습은 화려했지만, 금세 싫증 나게 되는 냄새나는 사람들, 이기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그는 계속 큰 바위 얼굴의 사람을 만나길 소망하며 열심히 살았다. 다른 사람을 돕고, 위로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그도 이제는 노인이 되었다. 죽기 전에 큰 바위 얼굴을 만나게 되길 일평생 소망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청년이 그에게 당신은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고 이야기해준다. 그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자신이 큰 바위 얼굴을 닮아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이야기의 큰 바위 얼굴은 내가 생각하는 어른의 모습을 갖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다. 

나도 내 안에 어른의 성숙함이 없다고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하려 한다. 속상하다고 짜증내고 속마음을 훤히 드러내 보이지 않고, 인내하며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한 치 앞이 아닌 먼 미래를 바라보며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위기와 절망 가운데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한결같이 소망하며 꿈꾸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사용하고, 나태해지지 않고 교만해지지 않고 싶다.


 아이들 앞에서 나도 똑같이 아이처럼 무너지고 주저앉을 때가 많다. 어른답고 싶은데, 어른답지 못하게 행동할 때가 생기곤 한다. 그럴 때면 지금의 나와 아이들이 바라보는 나 사이에서 괴리감이 커서 자괴감이 든다. 

하지만, 그런 것이 모두의 인생일 거라 생각한다. 다만 내가 생각한 목표의 어른이 되기 위해 아이들이 도구가 되어서 오늘도 채찍질할 수 있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내 안의 더러운 것들을 차마 알지도 못했지 않을까. 

그리고, 아이들이 없었다면 어른이 되기 위해 이토록 애타게 노력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냥 피터팬처럼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상태로 꿈꾸며 살아갔을지도. 어른이 된다는 것이 꿈을 잃고 현실만을 보고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상처를 입고 마음이 아프기 때문에 꿈꾸기를 거절하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는 계속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더 나은 내가 되기를 꿈꾼다. 지금의 나약하고 미숙한 모습에서 벗어나 성숙하고 내면이 강인하고 겉은 부드러워서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세워줄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큰 바위 얼굴이자 어른의 자화상이다. 아이들이 있어서 더 노력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아이들에게 존경받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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