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이불 한번 안 덮어준 사람 있을까?
오늘도 나는 자고있는 아이의 이불을 덮어준다. '이불을 덮어준다.'는 것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사랑이 넘치는 행위이다. 내 아이를 위해,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혹은 아픈 사람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는 그저 이불을 끌어올려 그 사람을 감싸주기만 하면 충분하다.
얼마전 서울에는 눈이 내렸다고 한다. 어느덧 나뭇가지의 잎은 떨어지고, 새벽 산책길의 해는 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겨울이 왔다. 이불을 제대로 덮어줄 시기가 온 것이다. 집 안의 잠자리 모습도 조금 바뀌었다. 이불은 여름보다 더 두꺼워지고 방 안에는 훈기가 없어 보일러를 때고 전기장판을 튼다. 가끔은 건조한 공기로 인해 목이 따가워 가습기도 함께 틀곤하는데 덕분에 아침에 일어나면 안개가(?) 자욱하다.
이불을 덮어준다는 것이 핑계가 될 수 있을까? 잠자리 교육, 분리교육 등 여러가지 말이 많지만 나는 아직도 초등학교 저학년인 두 아이와 함께 잠을 잔다. 가끔 딸아이가 자기방에서 문들 닫고 나오지 않을 때, 혼자있는 것이 좋다며 가족과 함께 외출하지 않는 아들을 볼 때 이제는 잠자리마저 떨어질 시기가 왔다고 생각되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을 붙잡고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다. 함께 부둥켜안고 자는 시간이, 매일밤이 지금도 아쉽다. 온전히 내 욕심이다.
언젠가 우연히 숙면, 수면에 대한 영상을 유튜브에서 보게 되었는데 나같은 중년의 나이에는 통잠을 잘 수 없는게 오히려 정상이라고 했다. 머리만 대면 잠에 골아 떨아지는 아이들에 비해 나는 중간중간 잠을 깬다. 언제부턴가 새벽에는 잠이 잘 오지 않아 살짝 비껴 일어나 거실로 나와 책을 읽는다. 늙는다는것, 몸의 리듬이 바뀐다는것. 당연한 자연의 이치가 아쉽고 서글프긴 하지만 덕분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룻밤 새 '여러 번' 이불을 덮어 줄 수 있다.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아빠에 비해 아이들은 머리만 대면 잔다. 마구잡이로 잔다. 잘 자도 그렇게 잘 잘 수가 없다. '남'으로 누워 있어도 '북'으로 돌아 누워있고, '동'으로 굴러 갔다가도 어느순간 '서'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아들이라고, 남자라고 어느덧 두껍게 자란 발은 누나 배 위를 누르고 있다가 어느순간 내 목을 찌르고 있기 일쑤다. 당연히 거기에 이불은.. 낄 자리가 없다. 하지만 나는 꾸역꾸역 이불을 찾아 덮어준다. 잠에서 깰 때마다 나도 모르게 저 멀리 도망간 이불을 찾아 또 덮어준다. 마치 본능처럼.
그래, 본능이다. 지 새끼가 자는 모습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짓지 않을 아빠가 어디 있을까? 다리 사이에 둘둘 말려있고 저 멀리 내동댕이쳐진 이불을 다시 끌어올려 덮어주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을까? 혹여나 배가 차진 않을까, 자리를 살펴주고 바른 자세로 다시 돌려 뉘여주고 이불을 덮어주는 것은 이제 인간이라는 동물에겐 무의식적인, 본능적인 움직임이 되어버렸다. 예전에 내가 머리만 대면 골아 떨어질 때, 지금 60이 넘은 내 부모님이 그랬고 지금의 마흔인 내가 똑같이 '이불을 덮어준다.' 지난달에 태어난 조카 역시 웃음 가득한 지 아빠의 미소 속에서 빠짐없이 이불을 덮고 있다.
우리는 사랑없이, 이불 없이는 못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