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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엄마와 특별한 아이

2022년의 기록(프롤로그)

by 흰돌

나는 아이를 위해 6개월 휴직 중이다. 복직한 2년 동안 내 삶이, 내 아이의 삶이 너무나 힘들고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육아휴직이 끝나고 2년 만에 학교에 복직을 했을 때 코로나의 악몽 중이었으며 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했고 점점 지쳐갔다. 하지만 아이는 휴직한 아빠와 고작 3살을 살아가고 있었다. 아이와의 애착을 위해 1년을 더 쉬고 싶었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나는 다시 일터로 나갔었다. 하지만 나는 내내 그때의 나의 결정을 후회했다. 돈보다는 내 아이가 더 소중함을 마음으로는 알았지만 결국 나는 머리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도 나의 복직이 나를 계속 괴롭게 한 이유 중 하나이다.

아이는 쉬운 아이가 아니었다. 먹는 것도 싸는 것도 자는 것도 어느 하나 쉽지 않았다. 대근육도 늦어 돌이 지나서야 걸었고 자주 부딪히고 다쳐서 내내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나의 복직으로 아이는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었다. 적응이 쉽지 않았고 느린 내 아이는 다른 아이와의 문제로 결국 어린이집을 갑자기 옮기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아이는 잘 적응하지 못했고 문제행동들이 나타났다. 눈 맞춤이 잘 되지 않았고, 자리에 잘 앉아있지 못했으며 두려운 상황에서 크게 감정 반응을 했다.


우리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달랐다. 아니 특별했다.


이뿐 아니라 아이는 어렸을 적부터 책을 좋아했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책 내용을 줄줄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혼자 한글을 읽게 되었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아이의 이런 특별함을 영특함으로 생각하셨다. 이 나이게 한글을 읽는 아이는 흔하지 않았기에. 하지만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다른 나의 아이로 인해 불안감이 점점 커졌고, 혹시나 내 아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영유검진을 받은 어느 날은 담당 선생님께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를 보고 자기만의 세계가 있어 보인다며 큰 병원에 가보기를 권하시기도 했다.

우리는 그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대학 병원을 예약했지만 오래 걸렸고 불안한 마음에 상담센터에도 가보았지만 그분은 아이가 정상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우리는 마음이 오락가락하였다. 결국 대학병원에도 가보았고 자폐보다는 ADHD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의견을 듣고 왔다. 자폐 검사도 해볼까 했지만 의사 선생님의 그 말씀으로 검사는 하지 않았고 ADHD는 너무 어릴 때는 진단할 수 없기에 우선은 집 근처에서 놀이치료를 시작했다.


그때 내 아이가 4살이었고 내 학교 업무는 너무 많았고, 새로 이사를 했으며 아이도 새로운 어린이집으로 옮겼기 때문에 너무나 바빴고 지쳐 있었다.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어 육아시간을 썼지만 많은 업무로 늘 늦게 아이를 데리러 갔다. 아침에도 둘 다 출근하는 탓에 아침 일찍 아이는 혼자 어린이집으로 가야 했다.


아이는 늘 어린이집을 가기 싫어했고 아침마다 전쟁을 치렀다. 늦게 데리러 갔을 때 아이는 지쳐 보였고 우리는 집으로 오면 밥 먹고 자기 바빴다. 그리고 가장 힘들었던 것은 선생님의 부정적인 피드백을 계속적으로 받는 것이었다. 아이는 여전히 충동적이었고 선생님은 아이를 버거워했다. 친구의 물건을 계속 손댄다거나 아무거나 입에 넣는다거나 늦게 자고 새벽에 계속 깨는 모습에 우리 가족 모두 지칠 대로 지친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내 아이는, 우리 가족은 불행했던 것 같다.


저녁 어스름에 차를 몰고 늦게 아이를 데리러 갈 때 나는 차 안에서 자주 울었다. 다른 아이들을 돌보느라 내 아이는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내 자신에게 계속 자괴감이 들었고, 우리는 왜 이렇게 행복하지 못할까. 늘 의문이 내 머릿속에 가득했다.


결국 나는 아이가 유치원 적응을 좀 더 잘할 수 있도록, 친구를 만들어 주기 위해 6개월 휴직을 결정하게 되었다. 아이가 최대한 잘 적응할 수 있게 일정한 패턴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침, 오후에 일정하게 버스를 타고 오고 내가 늘 마중을 나가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역시나 유치원에 잘 적응을 하지 못했다. 한 달 이상 등원을 거부했고 짐짝처럼 아이를 버스에 실어 보내는 날이면,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 집으로 돌아와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마음속 불안은 다시 점점 불어났고 선생님께 아이의 상태와 잘 봐달라는 말만 계속 드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아이는 조금씩 적응이 되었는지 곧잘 버스를 탔고 선생님께도 크게 부정적인 피드백이 오지 않았다. 낮잠을 자지 않아 아이는 하원 후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일찍 잠들기 시작했다.


처음은 쉽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우리에게도 평화라는 것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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