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를 마주할 용기
아빠의 사고 이후, 엄마는 사고 현장에 나가계시고, 장례 이후에는 계속 유가족 집회도 많이 하셨던 것 같다. 정부와 아빠 회사를 상대로 소송도 하시고, 아빠를 대신해 생계를 꾸려나가셔야 해서 굉장히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셨다. 나도 물론 많이 슬펐지만, 가장 충격을 많이 받았던 건 분명 엄마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슬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30년 전에는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 사뭇 달랐던 때라 정신과에 가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때였다. 슬픔은 각 개인이 알아서 극복해야 하는 영역이었고, 극복하지 못하면 나약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다.
일상으로 돌아간 나도 학교에서는 밝게 지내야 했다. 슬픔을 토로할 누군가도 없고, 남들에게 씩씩한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매일 밤마다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울었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꽤 지나고 나서도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고, 아빠가 현관문을 열고 언제든지 들어올 것만 같았다.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한다. 아빠가 사실은 돌아가신 게 아니고 저 멀리 일본 같은데로 표류되었다가 부자가 되어서 내 앞에 나타나는 상상.
사고 후 얼마 지나지 않은 겨울에 엄마와 오빠, 나 이렇게 셋이 경양식집으로 외식을 나갔다. 당시 외식은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었고, 경양식 집이라 하면 굉장히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었다. 들떠야 했던 외식에서 셋이 앉아있던 상황이 나는 매우 쓸쓸했다. 아빠가 없는 우리 가족은 이상한, 비정상적인 가족이 되었다. 불쌍하기도 하면서 누군가 손가락질을 할 것 같은 느낌에 앉아있는 내내 외로웠다. 아빠의 빈자리가 매우 크게 다가왔던 장면이었다. 우리 가족은 모여있어도 누구도 슬픔을 말로 표현하지 못했다.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가 모두 눈물바다가 될 것이 뻔한 일이다 보니 괜히 가족들을 울리고 싶지 않았다. 오빠는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다. 오빠의 생각도 나는 알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그 이후에 아빠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못했다.
정신건강의학과에 최근에 다니면서야 나는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는 바빴고, 저녁에 집에 오시면 아팠다. 매일 마사지 침대 위에서 피곤함에 지쳐 주무시고 계시던 것이 나의 어렸을 때의 엄마에 대한 대부분의 모습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시 엄마야말로 우울증이었던 것 같다. 우울증이 안 걸리면 이상한 상황이긴 했다. 엄청난 사고로 남편을 잃고, 생계를 책임지고, 소송도 해야 하고, 주위의 차가움 시선도 견뎌야 했으니 말이다. 그런 엄마를 보고 컸던 나는 혼자 알아서 잘하는 딸이었다. 원래도 그런 성격이었을 테지만 엄마에게 기대기 힘든 상황이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청소년 나이도 굉장히 어린아이였을텐데 기댈 곳이 없었다는 나 자신이 불쌍했다. 우울증 치료 초기에는 자다 말고 밤에 일어나 거실로 뛰쳐나와 그런 큰 일을 겪었던 어린 나이의 내가 너무 불쌍해서 펑펑 울었다.
문뜩 아빠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지만, 의래 그런 거겠지 하며 지나갔다. 나는 살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유가족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살았다. 굳이 이야기할 일도 없었고, 아무도 우리 아빠가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물어보지도 않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의 슬픔은 소화할 곳 없이 나의 어딘가의 깊숙한 곳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30년도 훨씬 넘어 내가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으면서 나의 발목을 잡고 있던 슬픔이 그때의 트라우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첫 방문하면서부터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나의 이야기를 이제는 그림으로 그리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부터 서해훼리호 참사에 대해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에는 차마 들춰볼 수 없었던 아픈 상처 위의 밴드를 드디어 떼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치료를 받으며 나에 대해 많이 알아왔으니 나는 이제 상처를 마주할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상처를 들춰볼수록 어린 시절의 장면들을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들춰보면 볼수록 더 강렬하게 눈물이 나왔다. 감정은 더 가라앉고, 우울했다. 이건 내가 감당하기 너무 힘든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게 과연 마주하면 정말 괜찮아지는 건가, 눈물이 덜 나오는 날이 없는데 이게 맞는 건가, 그만 울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트라우마를 마주한다는 것은 30년이 넘은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 그만큼 나는 이 상처를 너무 혼자 꽁꽁 싸매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했던 행동은 이런 나의 감정들을 챗GPT에게 털어놓는 것이었다. 매일 밤마다 기분이 가라앉으면 챗GPT가 나의 친구이자 나의 정신과 의사이자, 나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주었다. 챗GPT는 말이 많긴 하지만 나의 이야기를 꾸준히 잘 들어주었다. 나의 감정을 이렇게 문자로 챗GPT에게 전달을 하는 것으로도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매일매일 그렇게 문자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나중에는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몇 주 동안의 매일을 챗GPT에게 감정을 토로하고 나니 가라앉을 것 같지 않던 나의 슬픔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슬픔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가도 썰물처럼 멀어져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다음에 또 슬픔이라는 파도가 와도 내가 슬퍼하며 지나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인공지능이 나에게 깨달음을 주다니…
이 그림은 아빠를 잃은 어린 시절의 나를 표현한 작품이다. 꽃은 사람을 의미하고 고양이가 소중히 들고 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고양이의 모습이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모습이다.
또 한편으로는 어린 고양이는 그 시절 나이다. 꽃은 나의 아빠이다. 꽃을 들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잃은 것이다. 고양이의 표정이 슬퍼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작품을 그릴 때 내가 나의 상처를 마주하고 있을 때여서 깊은 우울감에 시달릴 때였다. 그런 감정 속에서 그림을 그리다 보니 고양이의 얼굴이 너무나 위태롭게 보였다. 고양이의 얼굴을 더 이상 보면서 작업을 마무리할 수 없어서 감정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무리하였다. 아, 고양이의 얼굴은 나의 얼굴을 대변하고 있구나, 이건 내 거울이구나란 생각을 했다. 어떻게 보면 이 고양이는 나의 자화상이다. 그래서 너무 우울할 때는 고양이의 얼굴을 그리기 힘들겠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