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마주하며 며칠 몇 날을 울다 보니 당시 너무 어려서 알지 못했던 서해훼리호 사고가 궁금해졌다. 검색도 해보고, TV에 나왔던 방송도 다시 보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경험했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엄마는 사고 이후에 많은 소송들을 하느라 바쁘셨는데, 소송을 했다는 사실만 기억이 났다. 그 소송이 어떤 소송이었는지,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결과를 알기 위해서는 당사자였던 엄마에게 여쭤보는 게 가장 직접적이고 빠른 방법이었는데, 나에게 그 사고와 아빠에 대한 주제는 나의 눈물샘을 터뜨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금기를 깨야만 했다.
어느 날 저녁 나만의 공간인 내 작업실에 앉아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소송 중에는 아빠가 다니던 회사에 아빠의 순직 처리를 요구하는 소송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 소송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아빠는 회사 야유회로 위도에 회사 사람들과 갔었던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순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에는 아빠처럼 회사 아유회로 위도에 갔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 어떤 곳에서는 순직을 한 것으로 처리해 주고 유가족을 대신 채용해 주어 정년까지 다닐 수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그렇게 따뜻하게 유가족을 위하던 회사도 있었구나 싶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소송은 나라를 상대로 하는 소송이었는데, 그 소송으로 사고 배상금을 받았다고 했고, 그 돈으로 엄마는 오빠와 나를 키울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배상금이 통장에서 줄어들 때마다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마음이 조마조마했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내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더 이상 대화하기 힘들어서 급하게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아, 역시 나에게 이런 이야기는 아직 이른 건가.
전화를 끊고 엄마와 나눈 대화들을 복기해 보았다. 엄마는 울먹거린다거나 슬퍼하는 말투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덤덤하고 어떤 순간에는 웃으면서 과거의 이야기를 나에게 하고 있었다. 엄마는 나보다 더 가슴이 아프고 힘들었을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맨날 슬퍼하고 있는 나와는 달랐다. 어떻게 과거를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엄마는 엄마의 슬픔과 트라우마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었을까?
엄마는 사고 이후 휘몰아치는 슬픔 속에서도 해야 할 일도 많았다. 시위도 나가야 했고, 소송도 해야 했다. 그러면서 많은 유가족들을 만나서 관계를 맺었다. 내 어릴 적 기억에도 그 사고를 통해 알게 되었던 전 지역의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엄마는 유가족들을 여느 친구들처럼 만났었다. 나는 그들과 같이 여행도 다녔고, 공부 잘하는 대학생이 있는 집에는 과외도 받으러 다니고 그랬다. 엄마는 그 사람들과 더 많은 것을 했을 것이다. 슬퍼하는 순간에도 같이 했고, 그러다가 같이 웃는 순간도 있었을 것이고, 같이 위로도 하고, 같이 일상도 공유하면서 슬픔을 이겨내지 않았을까? 슬픔을 같이 나누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해소가 되었을 것이다. 유가족들의 심리적 치료는 슬픔을 슬프다는 있는 그래도 표현하고 나누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엄청 걸린다고 하더라도 계속 끝까지 들어주는 것,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 필요하다.
엄마는 오랜 기간 동안 유가족들과 같이 관계를 쌓아갔다. 지금도 감사하게도 가끔 유가족들이 보내는 귀한 전라도 해산물이 우리 집에 보내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