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이 떠난 뒤 우리 가족은 상실감과 죄책감에 빠져 있었다. 약 70일 함께 살았을 뿐인데 빈이와 헤어지고 나서 갈피를 못 잡았다. 그 어린 생명을 며칠간 지켜보고, 집으로 데려오고, 씻기고, 친해지고, 같이 잔 기억은 잊을 수 없다. 잘한 것보다는 못 한 일만 생각났다. 그리고 빈이가 자라면 어떤 모습일지 너무나 궁금했다. 동네 검은고양이를 보며 빈이가 살아있다면 지금쯤 저런 모습이겠구나, 라고 생각할 때 빈이가 동생을 보내주었다. 똑같은 모습의 아기고양이가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둘째 밀이 복막염으로 한창 심각할 때 11월 때 이른 추위가 찾아들었다. 빈에 이어 밀도 어떻게 될까 봐 몸과 마음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우울했고 자신감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딸이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들었다. 싸늘한 바람이 한참이던 어느 날 학교 갔다 오던 딸이 어린 고양이 소리를 들었다고 얘기해주었다. 아직 우리는 그런 소리 들으면 안 돼!, 라며 나는 모른 척하려고 했다. 어린 고양이를 집에 들였다가 헤어지고, 밀이 중병에 걸렸으니 더는 안 되었다. 정말이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 되었는데 누울 수가 없었다. 오늘 밤 갑자기 추워진다는데 그 새끼 고양이는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보고와야 했다. 내가 엄마라서 그런가, 아기고양이가 엄마 없이 있다는 말이 걸렸다. 일시적으로 아이를 두고 외출할 수도 있으니 늘 1박 2일은 아기고양이 근처에 엄마가 없는지 반드시 지켜봐야 한다. 아기 고양이용 사료를 종이컵에 담아서 나가보았다. 과연 우렁찬 애용! 소리가 나고 있었다. 녀석을 쉽게 찾았다. 아파트 정원이자 1층집 밑에 있는 빈 곳에 혼자 있었다. 소리는 우렁찼지만 막상 내 그림자를 보더니 벽에 붙어 움직이지 않고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었다.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구조물을 보니 아기고양이가 스스로 들어갈 수는 없고, 사람이든 어미든 누가 넣어둔 것이었다. 그러면 엄마가 있을 확률이 높겠다는 희망을 갖고 사료만 놓아주고 왔다. 다음 날 아침 출근길에 가보았다. 제발 없어라! 주문을 외우며 조심조심 가보았다. 사료는 조금 먹었지만 인기척을 느끼더니 다시 우렁차게 울기 시작했다. 밤새 이렇게 울었을까. 가여웠다.
출근하며 마음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아픈 밀을 지킬 것인가, 추위에 떨고 있는 아기고양이 생명을 구할 것인가. 밀을 생각한다면 더 이상 밖에서 고양이를 들이면 안 되었다. 그렇다고 뻔히 보이는 곳에 있는 고양이를 그냥 내버려 둬야 할지 고민이 컸다. 결론은 일단 살리고 보자!, 였다. 고양이 구조를 잘하시는 지인에게 그림을 그려 설명하며 구조를 요청했다. 역시나 흔쾌히 고양이를 구조해주시고, 병원 진료도 대신 봐주셨다. 아이가 똘망똘망하다고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난 밀이 아픈데도 어린 생명을 모른 척할 수 없던 마음 약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나에겐 계획이 있었다. 최고의 2주 격리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지금 살고 있는 우리 집이 당시엔 비어있었다. 매물로 내놓았지만 팔리지 않았다. 서울 시내 아파트 거래가 절벽이어서 한 달에 270건 정도(평소엔 1만건)만 거래되던 때였다. 너무 안 팔려 매매는 포기하고 집수리한 뒤 다시 이사 들어올 계획이었다. 너무 추울 때 공사하기 싫어서 봄까지 비워두었다. 그 집에서 아기고양이를 2주간 격리했다. 이렇게 우리 집 셋째가 된 고양이가 바로 검은고양이 현이다.
현이는 빈이가 발견된 곳과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고, 검은 고양이 빈이와 현이는 얼굴도 똑같이 생겼다. 부모가 같은 다음 세대 새끼였다. 아랫입술 밑 턱만 조금 달랐다. 검은 고양이 빈은 아래턱이 모두 하얗고, 현이는 우유를 흘린 모습이다. 잘생긴 얼굴에 칠칠치 못하게 우유를 흘리는 모습이라 언제 봐도 웃음이 난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우리 아파트에 사는 검은고양이는 주기적으로 한 마리씩 새끼를 포기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내가 데려온다.
현이를 키우며 빈이를 보는 듯하다. 함께 지내던 고양이가 없어지면 상실감이 무척 큰데 이를 펫로스 증후군이라 한다. 나같은 경우는 거의 똑같이 생긴 고양이를 키우며 조금씩 치유했다. 엄마 슬프지 말라고 빈이 보내준 동생이라 생각하고 입양처도 알아보지도 않고 우리가 길렀다. 지금 거대 고양이가 된 현이를 보면 빈이 하늘에서 미소짓고 있는 것 같다. 빈이도 살았다면 이렇게 윤기나는 거대고양이가 되었겠지. 내 마음속엔 항상 아기고양이 빈이가 들어있다. 평생 자라지 않는 피터팬같은 아기고양이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