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좋아하는 작품이 있으면 반복해 본다. 잭 런던의 소설 ‘야성의 부름’과 ‘불을 지피다’도 주기적으로 다시 보는 작품이다. 살을 찢어져 나가는 생생한 묘사에 미간에 주름이 생기고 심장에 피멍이 들어도 인간과 동물의 교감이라는 가슴 뭉클한 주제가 감동적이다. 앞 작품은 완성된 교감으로 감동과 눈물을 준다면, 두 번째 작품은 교감의 부재로 인한 비극에 탄식을 내뱉는다. 고양이 엄마가 된 후로는 동물의 상상력이라는 주제가 덧입혀져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역시 사람은 경험하면서 무르익는다.
야성의 부름을 읽을 땐 홍이가 주인공인 ‘벅’이 되어 내 머릿속에서 멋지기도 하고, 잔인하게 곤봉에 맞기도 하고, 먹지 못해 마르기도, 썰매를 끌다가 쓰러지기도 한다. 홍이와 닮은 자손들이 들판을 가득 메우고 뛰는 장면을 그리며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다. 책을 덮으며 홍이의 성장에 가슴이 벅차다. 옆에 있는 현실의 홍이를 보며 안도하기도 한다. 다행이다, 썰매를 끌지 않아서, 그리고 나와 헤어지지 않아서.
벅의 마지막 주인, 존 쏜튼은 통나무 운반 일을 하는데 동상에 걸려 텐트를 치고 마을에 머물렀다. 벅이 생각할 때 쏜튼은 개 돌보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자기를 사랑해 준다. 벅은 대장으로 존대받으며 살았던 판사댁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쏜튼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개가 된다. 통나무를 나르다 급류에 휩싸인 쏜튼의 목숨을 구했다. 쏜튼은 그의 머리를 앞뒤로 흔들며 욕지거리를 해대고(그만의 애정 표현 방식), 벅은 쏜튼의 팔에 이빨자국이 생길 정도만 무는 것으로 화답한다. 그를 위해서 500Kg이나 되는 얼어붙은 썰매를 끌어 내기에서 이기게 해주었다. 한 마리의 개가 도저히 해낼 것 같지 않은 일을 해낸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술김에 내기를 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벅에게 무거운 짐을 끌게 했으나, 쏜튼은 벅의 귀에 이렇게 속삭이며 거인의 힘을 발휘하게 한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네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주인에 대한 사랑이 펄펄 끓고, 몸도 좋았던 벅은 얼어붙은 무거운 썰매를 움직여 100미터나 끌고 간다. 지켜보던 사람은 모두 탄성을 내뱉고 쏜튼은 벅이 보여준 사랑에 눈물을 흘린다. 얼마나 가슴 벅찬 순간인가! 쏜튼과 벅의 최고의 순간이다. 쏜튼이 귀에 속삭이던 말을 여러 번 되뇌어 보고 가슴에 새겨본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네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이 대목에는 나도 작품 속으로 들어간다. 내가 쏜튼이 된다. 나도 홍이와 통하는 여러 표현을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외친다. 컴온 홍이, 렛츠고 홍이! 그리고 둘만의 방식으로 실컷 애정표현을 하면 홍이도 내 손에 이빨 자국 날 정도만 힘을 주어 문다. 홍이는 기분이 좋으면서도, 고양이한테 하듯 내 손을 힘주어 물면 털 없는 내가 아파한다는 것쯤은 일찌감치 아는 훌륭한 고양이다. 주변 사람들은 홍이의 분별력에 찬탄을 금치 못한다.
벅과 쏜튼처럼 나와 홍이도 세상에 둘도 없는 관계이다. 산에서 2월과 3월을 함께 보내며 나는 한 존재의 마음을 얻게 되었다. 물론 홍이도 나의 마음을 일찌감치 얻었다. 우리는 기다림과 만남을 통해 교감했다. 우주에 단 하나 뿐인 홍이와 나인 것이다. 반백년 세상에서 살고 홍이를 만났다. 우리는 어떻게 이어진 것일까. 그날 내가 약수터에 가지 않았더라면, 홍이가 내 장갑을 물고 냅다 산으로 뛰어 올라가지 않았더라면, 백화점에서 산 장갑을 고양이가 물고 갔다고 내가 화가 났더라면, 절대 이어지지 못할 인연의 끈이다.
좋아하는 작품을 반복하여 찾는 나는 홍이가 좋아 똑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똑같은 노래를 매일 부르고, 같은 놀이 계속 하고, 과장된 목소리로 예쁘다고 외치는 것도 반복한다. 홍이가 정말 좋기에 그렇다. 잠든 홍이 귀에 속삭인다.
내가 홍이를 사랑하는 만큼, 홍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아마 홍이는 엄마를 위해 뭘 할까 궁리하며 잠든 척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