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컵 가져왔어요.”
컵을 보는 순간 그날이 떠올랐다. 교무실 바로 옆에 1학년 교실이 있는데, 나는 그들을 이웃사촌이라고 여기고 있었나 보다. 내 오지랖을 못 이기고 그 반 창가에서 멀쑥 키만 자라던 토마토 세 그루를 텃밭으로 옮겨 심었다. 작은 화분에서 쑥쑥 자라던 토마토가 대견하기도 했지만, 어느새 열매까지 달려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쓰러져 가는 작은 집에 옹기종기 사는 흥부네처럼 보였다. 벌써 2주 전부터 밖에다 심자고 내가 먼저 바람을 넣었는데 매번 깜빡했다. 더는 미룰 수 없어 그날 수업 끝나기 10분 전에 짬을 내서 학교 텃밭으로 나갔다. 짧은 시간이지만 밖에 나간다고 장난꾸러기들은 신났었다. 그래봐야 교내였는데 말이다.
들떠 있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12년차 도시농부답게 토마토 심는 법과 곁순 제거에 대해 알려주었다. 이것이 원줄기이고, 줄기와 잎 사이 겨드랑이에서 곁순이 나오며, 곁순을 꾸준히 제거해야 한다며 아는 척을 했다. 끝으로 물관리까지 신신당부하며 마무리했다. 원줄기와 곁순을 구분하지 못하던 아이들 앞에서 곁순 제거 시범을 보이며 맨손으로 땄다. 교실에서 너무 자라서 그런가 줄기가 질겨서 손으로 잘 잘리지 않았다.
“그럼 얘들은 이제 죽어요?”
“아니. 그거 알아? 이거 물에 꽂아 놓으면 뿌리가 나와서 또 토마토 모종이 돼!”
정말이냐며 신기해하는 아이들에게 교무실에 있던 짙은 남색 컵에 물을 받아 곁순을 담가 주었다.
“교실 창가에 두고, 매일 들여다보면 여기서 하얀 뿌리가 나온다?”
물 잘 갈아주면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사이 종이 쳤다. 오며 가며 텃밭에 있던 토마토는 꽤나 신경 써서 보고 있었는데, 교실에 물꽂이하던 줄기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빈 컵을 보며 뿌리는 잘 내렸냐고 물었다. 모두 썩어서 버렸단다. 마침 오늘 기말고사 전 대청소를 맞이해서 컵이 눈에 띄었고, 썩은 물을 확인했겠지. 너무나 깔끔하게 씻긴 빈 컵을 덩그러니 받으니, 물에 녹아 썩어버린 토마토 줄기에게 미안했다. 나도 나지만, 30명이나 되는 아이들은 왜 신경을 못 썼을까? 한 명만 신경 써도 되는 일이었는데 말이다. 그 한 명이 없었다니.
이 아이들은 얼마 전 고등학교 입학 100일을 맞았다. 담임 선생님들은 엽서에 츄파춥스를 붙여주며 아이들을 축하하고, 아이들도 서로 자축하며 기분 좋은 하루를 보냈다. 내년에는 백일떡을 해서 돌리자고 학교에 건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수업에서 아이들에게 올해 입시에 대해 소개하며(입시를 준비하려면 3년치 경향을 알고 있어야 하기에) 지난 백일을 한번 떠올려 보자고 했다. 매일 수업 듣고, 시험공부하고, 시험 끝나니 과목마다 수행평가가 서너 개씩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100일을 떠올리는 아이들의 눈이 촉촉해 보였다.
수행평가 와중에 기말고사도 준비해야 하기에 아이들은 항상 고단하다. 학생부종합을 준비하고, 자신의 진로를 탐색하기 위해 틈틈이 학교에서 마련한 각종 활동에도 참여해야 한다. 멘토-멘티 활동에 참여하고, 봉사시간도 포기할 수 없기에 프로젝트 봉사활동에도 참여한다. 헐레벌떡 저녁 때우고 학원에도 가야 하는 아이들이다. 어떤 날은 수행평가가 두세 개씩 겹쳐서 수업 진도를 나가는 것도 미안할 지경이다. 아이들이 나를 보고는 있지만 영혼은 한국사를, 영어를, 통합사회를 그리고 있기 때문인지 텅빈 눈은 하고 있다.
“그러니까, 얘들아, 재학생은 수시에서 꼭 승부를 봐야 해.”
비겁한 나는 아이들에게 위로는커녕 계속 열심히 해서 학생부 교과나 학생부 종합으로 근처에 있는 대학에 꼭 가자고 부추긴다.
학생들을 이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만든 교육과정이 토마토를 죽였다. 혹시 입시가 범인인가? 아니면 둘이 공범인가? 어디 숨 돌릴 틈이 있어야 옆에 친구도, 토마토도 한 번 볼 수가 있지 않을까. 빠르게 굴러가는 수레바퀴에서 토마토가 나뒹군다. 아이들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난 그저 같은 말만 해줄 뿐이다.
“얘들아, 꼭 잡아야 해!”
아이들에게 초원으로 향한 문을 열어 주고 싶다. 눈이 밝아지게 말이다. 도깨비가 부러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