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 아야의 '나무'를 읽고
고향집 울타리는 생울타리였다. 참죽나무가 빙 둘러 뒷마당을 감쌌다. 내가 어릴 적에도 이미 큰 나무여서 늘 올려다 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해가 들어오면 얼굴을 찡그렸고, 내 덧니가 드러났다. 삐죽삐죽 자라는 어린 가지가 내 눈높이에 맞았는데, 씨앗보다는 뿌리에서 퍼지는 곁가지가 더 왕성해서 여기 저기 어린 나무가 자랐다.
봄이면 어머니가 붉은빛 새순을 따셨고, 부엌에서는 고소한 참죽나물 무치는 냄새가 퍼졌다. 나뭇잎이 왜 초록이 아니고 이렇게 붉을까, 참 궁금했다. 저녁이면 마루에 둘러앉아 나물을 입안 가득 넣으며, 그게 봄이라는 계절의 맛이라는 것도 모른 채 먹었다. 줄기가 굵직해서 씹는 맛이 좋았고, 잎사귀에는 양념이 고루 배어 맛있었다. 함께 씹으면 특유의 향과 양념이 고루 퍼지는 풍미에 눈이 절로 감겼다. 참죽나무는 매년 어김없이 새순을 틔웠고, 우리 형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먹으며 성장했다. 그때는 몰랐다. 고향을 떠나 제일 그리운 것이 참죽나물이 될 줄은.
여름이면 참죽나무는 짙은 초록 잎으로 우리를 감쌌다.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커다란 등걸에 그네 하나 매어줄 법도 한데 아무도 그러질 않았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시원했지만, 어느 날 밤은 바람소리가 무섭기까지 했다. 집에 왔던 손님을 배웅하던 그 밤, 나는 그 소리가 무서워서 빨리 집을 떠나고 싶어졌다. 손님들처럼 말이다. 참죽나무는 그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어린 나이에 왜 그 소리가 서늘했을까. 아직도 모르겠다.
가을이 되면 참죽나무의 잎은 누렇게 말랐다가 순식간에 바람 따라 떨어졌다. 뒤란엔 낙엽과 씨앗이 수북이 쌓였다. 참죽나무의 씨앗은 초록 올리브처럼 자라다가, 짙은 갈색으로 익는다. 다 익으면 겉껍질이 다섯 갈래로 갈라지는데 별모양으로 갈라진다. 어쩜 자연은 이토록 균형을 잘 잡을까. 잔뜩 벌어진 겉껍질이 감싸고 있던 것은 뾰족한 달걀 모양의 씨방이다. 노르끼리하고 보숭보숭한 코르크인데, 길쭉하고 뾰죽한 등모양으로 생겨 밤이 되면 불이 켜질 것처럼 예쁘다. 그 안에 씨앗이 소중하게 감춰져 있는데, 날개가 달려있어 어디로든 날아갈 것만 같다. 마치 채 자라지 않은 아이가 집을 떠나 고생하듯, 바닥에 떨어진 씨방은 무심히 밟힌다. 나는 낙엽을 밟으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즐겼다. 아버지는 갈퀴로 낙엽을 긁어모아서 태우셨다. 이효석의 수필처럼 고급스러운 삶은 아니었지만, 태울 수 있는 낙엽이 있어서 좋았다. 이런 일상은 매년 반복되었다. 나무도, 계절도, 나도, 아버지도, 늘 그 풍경속에 있을 줄 알았다.
무심한 듯 시간이 흐르고, 어떤 겨울엔 고양이가 나무 밑에 죽어 있었다. 처음 보는 고양이의 비보를 전하니 아버지는 장갑을 끼고 나가셨다. 나의 어린 시절을 그곳에 묻고, 나는 꿈을 안고 집을 나왔다. 학교에 가고, 직장을 구하고, 도시에서의 삶에 익숙해지는 동안 고향집도, 참죽나무도 조금씩 잊혔다. 부모님도 고향집을 떠나고, 빈집으로 있다가 집이 팔렸다. 옆집 친구가 집을 샀는데 집을 정돈하면서 참죽나무 베어냈다. 뿌리가 집 쪽으로 퍼져서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고도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어차피 이제는 남의 집이고, 나무야 흔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날 밤,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몇십 년을 우리집에서 뿌리내린 참죽나무가 사라졌다니.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눈물이 흘렀다. 쓰러져버린 세월에 내가 휘청했다.
참죽나무가 없어진 집풍경을 떠올리며, 나는 처음으로 그 나무가 내 안에 얼마나 깊게 자리 잡고 있었는지를 느꼈다. 단지 식용 나무도, 그늘을 주는 나무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자란 시간의 풍경이자, 계절의 흐름이 눈으로 보이던 생명의 시간표였고, 가족과 함께했던 고요한 삶의 배경이었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그 나무를, 나는 늦게서야 그리워하게 되었다.
부모님도 세상을 떠나시고, 익숙한 사람, 시공간은 점점 사라졌다. 어느 날 나는 참죽나무 묘목 다섯 그루를 샀다. 손바닥보다 작은 잎사귀를 가진 호리호리한 묘목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마치 옛 친구처럼 소중히 들고 왔다. 고향의 마당은 아니지만, 내가 가꾸는 밭 한 켠에 심었다. 삽으로 땅을 파며, 한 뿌리 한 뿌리에 물을 주며,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끌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 나무가 자라면 언젠가는 다시 봄마다 나물을 딸 수 있을까. 여름이면 그늘 아래서 숨을 돌릴 수 있을까. 낙엽이 떨어지면 다시 그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겨울엔 고양이의 쉼터가 될 수 있을까.
3년째 나무를 돌보지만 한 번도 잎을 따지 않았다. 딸 수가 없다. 이렇게 아낀다고 그때의 풍경은 되돌아오지는 않는다는 것은 잘 안다. 내가 그 나무를 키우며 되찾고 싶은 건 단순한 장면이 아니라, 그 장면 안에 담긴 따뜻함과 아련함, 그리고 지금은 먼 곳에 있는 가족의 온기이다. 내가 늙어갈 때쯤이면 다시 울창한 참죽나무 생울타리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참죽나무는 내 어린 시절의 기둥이었다. 지금은 내가 어린 나무의 기둥이 되어주려 한다. 작은 묘목 하나가 나를 다시 예전으로 데려가고, 미래로 이끌어줄 것이기에. 안타깝게도 세 자녀 모두 참죽나물 냄새를 견디지 못한다. 아마 아이들은 다른 나무를 마음에 품고 있을 것이다. 누구나 나무 한 그루 가슴에 품었으면 좋겠다. 나무가 자라고 자라서 마음이 커지고, 그 사람이 자란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