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 아야(1992). 나무. 책사람집.
나무의 시간
고양이의 시간은 인간보다 빨리 흐른다. 서너 배는 빨리 흘러 그들과 함께 보내는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반대로 나무의 시간은 사람보다 천천히 흐른다. 천 년 된 나무는 어린 축에 드는 나무도 있다. 천 년은 어떤 무게일까? 우리 곁에 있는 나무는 사람의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 안타까워하고 있을까? 긴 시간 지구에서 살아가는 나무는 행복할까, 심심할까, 그저 무덤덤하게 견디고 있을까.
나무가 죽은 것?
나무는 나무로서의 생명과 목재로서의 생명이 있는데 나무일 때가 첫 번째 생이라면 목재가 된 후에는 두 번째 생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목재를 간단히 죽은 나무로 취급하는 인식은 이해의 깊이가 얕은 데서 비롯된다고 니시오카 씨는 말한다. (119-119)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책도 나무에서 유래했다. 책상, 의장, 책장, 침대, 수저 등 생활 속에 목재는 많다. 어떤 삶을 마무리하고 나에게 온 것일까. 두 번째 삶은 더 길고 의미가 충만했으면 좋겠다. 어떤 나무 장인은 이런 목제품은 죽은 나무가 아니라 나무가 죽은 것이라고 한다. 일본어로 표현하면 좀 다를까? 차이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죽은 나무
도시에 사는 나무는 불행하다. 그저 이름 없이 삶을 견딘다. 나무의 마음 따위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이 바쁘게 흘러간다. 나무는 원치 않는 곳에 어울리지 않게 심어졌으며, 오래 살지 못한다. 좁은 도로, 아파트, 학교에서 간신히 터를 잡은 나무는 과한 가지치기도 견뎌야 한다. 어떤 나무는 그것을 견디고 가지를 더 내기도 하지만, 얼마 뒤 고사하기도 한다. 돈을 아끼기 위해 생명이 있는 나무의 팔다리를 과하게 잘라내는 천박한 사고. 당신의 손톱도 그렇게 자르면 좋겠어요? 당해는 어찌어찌 준비해 둔 수액으로 버틴다고 하더라도 다음 해, 혹은 그다음 해에 고사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사라진 산수유
생명체는 살고 있는 환경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 엄마로 살다 보니 생명이 사라진 자리는 무섭고 공허하다. 얼마 전 20년간 우리 집 베란다를 봄마다 환히 밝히던 산수유가 사라졌다. 퇴근길에 발견하고는 주변을 한참을 둘러보았다. 잘려진 밑동엔 새순이 나지 말라고 니스칠까지 해두었더라. 태풍이 할퀸 자리에 불암산의 참나무와 아카시나무는 뿌리가 뽑힌 채 나동그라져 있다. 일본은 화산활동이 활발한 지역이 많아 화산재로 인한 피해를 나무가 고스란히 이고 서있다. 본 적이 없어 상상만 하지만 화산재가 쌓인 곳에 비마저 내리면 콘크리트처럼 굳는다고 한다. 나뭇잎은 고사해서 떨어지고, 무거워진 가지는 부러진다. 스산한 모습을 만든다. 혹은 뜨거운 화산재를 맞아 역시 윗동은 사라졌다. 어쩌란 말이냐. 삶은 사람에게도 나무에게도 가혹하다.
화산재를 맞은 나무
우리나라에는 화산활동이 없다보니 이런 경우도 다 있구나, 싶은 안타까운 환경에 처한 나무도 있다.
8월에 별안간 하늘에서 쏟다진 재를 맞고 나뭇잎이 떨어져 나갔을 때는 기절하는 심정이었으리라. 일주일 만에 겨우 싹을 틔웠을 때는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얼핏 별문제 없어 보이지만 아직도 푸른 이 잎을 앞으로 어떻게 처리해가라는 말이냐. 아마 이제 기력을 다해서 내년의 생명을 틔울 여력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초록색 잎의 가을’이라고 하면서, 식물의 생명력에 감탄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나무는 이미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위험한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닐까. 나무는 어떤 면에서는 분명 강인한 존재다. 하지만 재의 강력함을 어찌한단 말인가. 재가 단순히 재 상태로만 존재한다면 흘러내린다든가 바람에 날린다든가 해서 어떻게든 벗어날 길이 있다. 그러나 비를 만나면 끈기가 생기고 물기가 마르면 굳어버리는 이단, 삼단의 구조다. 이 집요한 힘 앞에 나무들은 지금 거의 패배한 듯 보이는데 곧 눈의 계절이 오려고 한다. 죽느냐 사느냐, 필사적인 가을이다. (163-164)
삼나무
책을 보니 삼나무는 일본의 대표적인 나무이다. 한국에 소나무, 참나무가 어디에나 있다면 일본은 삼나무, 편백, 벚, 단풍이 흔한 모양이다.
삼나무는 온몸의 초록빛을 빗방울로 치장하고, 석양빛은 빗방울을 반짝이게 하여 다이아몬드로 만들었다. 이렇게 화려한 삼나무를 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거대한 삼나무 노목이 다이아몬드 장신구로 치장한 모습을 보여주다니. 일부러 만나러 와주면 삼나무도 환대해준다. 손기도 해님도 선물을 주신 것 같다. (205)
포플러와 성냥개비
이탈리아에서 푸른 숲을 이루고 잘 자라는 포플러가 부러워 일본에 도입한 사람이 있다. 1년에 4미터나 자라는 놀라운 성장세에 감탄하며 묘목을 만들고 2-30년을 키웠다. 나무도 운명이 있나 보다. 널리 식재하니 외국에서 온 나무에서 보이는 여러 어려움이 보이고, 성냥개비용도로 쓰려했으나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해 성냥을 쓰는 사람이 없다. 쑥쑥 자란 나무는 잘려 퇴출당한다. 공장으로 가서 작은 성냥개비로 변신한다. 우리가 가끔 쓰는 케이크에 붙어 나오는 성냥이 포플러일까?
나만 겪는 불행이 다가온다면
사람의 행복감은 태어난 국가, 태어난 가정에 의해 많이 좌우된다. 나만 겪는 불행이 찾아온다면 도망가고 싶지만 움직일 수 없다면 어찌해야할까.
행운과 불운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나무도 그것을 피할 수는 없다. 불운을 짊어지는 나무도 생겨나기 마련이다. 불운의 형태는 다양하다. 폭풍, 눈보라, 산사태, 쓰나미, 화산재, 들불, 병충해 등으로 많은 나무들이 동시에 같은 불운을 짊어진다. 그런가 하면 오직 홀로 겪는 불운도 있다. 나가노현에서 본 편백나무는 돌출된 벼랑 위에서 자라고 있었다. 줄기를 보니 무릎 놓이 정도 오는 곳에 직사각형의 구멍을 뚫고 철사를 꼬아 만든 줄을 감아 골짜기 아래로 연결해놓았다. 주위를 살펴보니 무슨 공사를 위해 설치한 듯했다. 튼튼한 밧줄을 설치해놓은 이상, 조만간 제법 중량이 나가는 물건을 골짜기 아래로 내려보낼 것 같았다. 너무 잔혹한 방식이다. 파낸 부위에는 계속 나무진이 눈물처럼 방울방울 맺혔다. 어느 정도의 행운과 불운을 겪는 일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나무처럼 얌전하고 조용히 살아가는 존재가 왜 이렇게 끔찍한 일을 겪어야 하냐며 불평하고 한탄할 때가 있다. (207-208)
마음에 걸리는 나무, 버드나무
버드나무는 마음에 걸리는 나무이다. 해마다 4월이면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에 초록물이 깃드는 것을 볼 수 있다. 물가에 흔히 보이는 능수버들이 새옷을 입을 때면 나는 가만히 하늘을 오려다 본다. 이맘때 아버지가 병원에 가셨기 때문이다. 점점 아름다워지는 4월에 아버지는 회색 병원에 갇혔다. 이 일은 두고두고 4월이면 나를 아프게 한다. 많고 많은 나무 중에 왜 하필? 서울농대와 농촌진흥청이 수원에 있던 시절, 그 근처에 살았다. 서호천을 따라 가로수처럼 수양버들이 많았기 때문에 많고 많은 나무 중에 버드나무가 아버지의 입원을 가늠하는 지표가 되고 말았다. 나에게 버드나무는 슬픔의 시작이다. 지금도 뜨거운 태양아래 물바람을 따라 긴머리를 흩나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해 여름은 우리 가족이 가장 심란했던 시기였다. 지금은 왕숙천을 따라 봉긋하고 둥글게 자라는 버드나무를 보며 아버지를 떠올린다. 이 아픈 나무에 고다 아야는 강인한 이미지를 입혀 주었다.
주위 상황에 기 눌리지 않고 강문과 바람에 맞서는 강인함이 있었다. 이미 사람 키의 곱절은 돼 보일 정도로 성장한 군락이어서 모래톱에 정착한 지도 몇 년은 지났을 것이다. 강물이 불면 잠길 테고 그러면 당연히 뿌리째 쓸려나가는 경우도 허다할 텐데 용케도 여태껏 무사히 버텨왔다 싶다. 어쨌든 선구자 격 식물이라 악조건에서도 살아가는 힘이 발군이라고 누군가 가르쳐 주었다. 선구자라는 단어가 몸에 사무쳤다. 수양버들의 낭창낭창한 모습은 충분히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지만 황무지에 앞장서서 살아가는 씩씩함도 버드나무의 본성이었다. 이후 버드나무는 마음에 걸리는 나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