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7년 전, 결혼을 앞두고 있었으나 미혼이었고 내가 언젠가 엄마가 되리라는 것은 전혀 상상하지 못하고 있을 어느 평범한 날이었다. 선배 선생님이 같은 학교에 다니는 2학년 아들의 가방을 매일같이 들어주는 것을 본 동료가 물었다.
'아들 가방을 왜 매일 들어주세요? 어디 불편한가요?'
나도 그 선생님이 아주 건강하다 못해 체중 과다로 보이는 아들의 가방을 매일 들어주시는 걸 보고 내심 과잉보호라고 여겨왔던 터였다. 근데 교직경력 대략 10년쯤은 위인 선배님한테 질문이 좀 거침 없잖아? 라고 생각하며 선배 선생님의 얼굴을 살피는데, 그 선생님이 과장되게 울상인 얼굴을 하며 말씀하셨다.
'짠해. 너무 짠해서 들어주게 돼.'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그 아이와 혈연으로 엮이지 않은 내가 보기엔 짠한 구석이 1도 없어 보였다. 걘 일단 영양 상태 충분해 보이고 주눅 든 모습을 본 적도 없고 하고 싶은거 다 하고 산 아이처럼 구김 하나 없이 밝던데? 도대체 어디가 짠한 걸까. 예상밖의 답변이었다. 이어지는 선생님의 말씀.
'첫째라서 둘째한테 항상 양보만 하고. 너무 짠해.'
나도 첫째로서, 첫째들이 가지는 그 태생적 억울함을 깊이 공감하는 바이다. 그런데 동생한테 양보좀 하는게 그렇게 애틋할 일인가? 아무리 엄마라지만 교사이기도 한데 비이성적이시네. 저러다 애 버릇 나빠지겠다 쯧쯧, 하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7년이 지나 나는 이제 그때 선생님의 '짠하다'는 말을 10000% 이해하는 엄마가 되었다. 평범하고 이성적인, 상식적인 사람들이 볼 때의 우리 아이는 '행복한 5살 남자아이'일 것이다. 방방 뛰어다니며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신기하고 즐거운, 딱 그 나잇대의 행복한 아이. 그러나 지금 내가 보는 우리 아이는 어떠한가. 당장 일주일후부터 '아침 8시부터 등원 시터에게 맡겨져 정글 같은 유치원 생태계에 적응해야 하고 (업무에 시달려서 충분히 관심을 주지 못하는)엄마의 손길이 늘 그리울' 내 새끼인 것이다. 나는 나의 안구에 나의 사사롭고 과도한 감정들을 엄청나게 씌운 후 아이를 보게 되었다. 개학에 대한 불안함, 일과 육아를 병행하여 바빠질 미래에 대한 걱정, 심지어는 나의 업무분장에 대한 억울함까지도 모두 내 새끼를 볼때는 '짠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어디 나뿐이겠는가, 실제 교사 동료들과 대화를 해보면 다들 자기 아이가 짠하다고 한다. 7살인데도 짠해, 중학생이어도 짠해, 워킹맘이든 전업맘이든 첫째든 둘째든 막내든, 상황이 모두 다른 엄마들이 자기 새끼를 볼때는 기본적으로 '짠함'을 어느정도는 장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건 그냥 논리의 영역을 떠났다. 객관적인 상황에서 나오는 감정이 아니라 사랑하니까 당연히 드는 연민, 애틋함 같은 것. 엄마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는 것 같다.
물론 아이의 바른 성장을 위해 이 '짠함'을 마구 표출해서도 안될 것이다. 누가 옳고 그르다는 문제가 아니라 나는 그 시절 그 선배 선생님처럼 매일같이 가방을 들어주는 엄마는 되지 않을 것 같다. (후에 그 선생님에게는 아이가 많이 짠할 수 밖에 없는 사연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이와 함께 할 많은 시간 동안 아이를 너무 애틋함만으로 보지 않도록, 나름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려고 애쓸 것 같다. 마음 속 깊은 곳의 짠함을 대신 따뜻한 손길로, 말로, 포옹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해야지. 아니, 엄마가 개학하는건 1차적으로 엄마가 짠한거지 애가 가장 짠할 일은 아니잖은가? 20%의 냉정이 지금 나에게 필요하다. 우리 애는 짠하지 않다. 짠한건 나다.개학 스트레스 워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