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포로수용소에 가다
"엄마! 포로가 뭐야?"
큰 아이의 말에 핸들을 잡은 두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현충일을 맞이해 인근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어린이 체험행사를 한다기에 가던 길이었다. 여름 맞이로 산뜻하게 머리를 자른 큰 아이는 바뀐 헤어 스타일이 마음에 드는지 연신 머리칼을 매만지는 중이었다.
포로, 사로잡힌 적.
그 단어가 흐린 하늘처럼 아득해지고 빛바래서 낡은 깃발같이 펄럭였다.
우리가 간 곳은 거제 포로수용소다. 거제는 한국 전쟁 당시 인민군, 중공군 등 전쟁포로를 수용했던 큰 감옥이었다. 섬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극적으로 활용하여 17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포로들을 가두어 둔 곳말이다. 그 사실까지 모두 잊은 듯 초록의 나무와 후덥지근한 공기가 포로수용소 분수 광장 전체를 메웠다.
아이들은 신이 났다.
목요일인데 학교도 가지 않고, 손에 달콤한 솜사탕을 잔뜻 뭉친 채 어떤 체험부터 할까 행복한 고민에 발을 굴렀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어린아이들과 아이들을 뒤쫓는 부모들로 가득했고, 아이들의 흥미에 딱 맞는 각종 만들기 행사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광장 한가운데, 시원한 물줄기를 하늘로 쏘아대는 분수 아래에는 그 물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해방된 듯 기쁨으로 포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포로였을까?
그들은 이곳에서 정말 해방되었던 것일까?
증거는 바로 곁에 있었다. 이미 70년도 더 넘게 지났지만 포로수용소 안에는 그들의 삶의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다. 답을 찾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계룡산 아랫자락에 포옥 안기듯 들어선 그곳엔 지금은 관광객들을 위한 전시관과 레저 체험 등 즐길거리가 한가득이다. 그런데도 바뀌지 않는 것들은 특유의 공기와 언덕이었다. 오르락내리락 이어지는 급경사길로 돌아다니다 보니 두 아이와 호흡을 맞추기 힘들었다. 조금 쉬고 싶다 싶을 때면 어김없이 전시관이 나왔다.
해맑은 아이들은 더운 햇살을 피할 수 있는 서늘한 전시관이 나오면 좋아라 했지만 나는 그곳에 들어가기 무서웠다.
낡고 허름한 옷에, 보기에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무기들을 든 포로를 재현한 인형은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누가 누구랑 편이고, 어떤 무기들이 사용되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잡혔는지 가늠할 수 없는 숫자와 낡은 사진, 모형들은 너무나 담담하게, 차갑게 나열되어 있어 그곳이 진짜인지 오히려 믿기지 않았다.
포로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하나의 개념처럼 말하는 포로. 그 한마디 말 아래에는 진짜 이름이, 삶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여기 있었다는 17만 명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포로수용소에서 본 것은 그저 전쟁의 한 장면을 승자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이었을 뿐이다.
보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김 아무개
고향은 어디 나이는 몇 살
형제는 얼마나 있는지
꿈은 무엇이었는지
그 꿈은 이루었는지.
포로의 삶 이전의 삶과 그 이후이 삶은 갈기갈기 찢긴 채 '포로'라는 말만 남았다.
그것에 내가 딸의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던 이유다.
유월이면 우리는 현충일, 의병의 날, 6`10 민주항쟁, 6 25 전쟁기념일 등 뭉뚱그려서 호국보훈의 달이라고 말한다. 학교에서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신 분들을 기억하고 잊지 말자며 각종 계기 교육을 하고, 태극기 게양 방법을 알려준다. 일 년 열두 달 중 한 달 정도는 이렇게 잘 살게 해 준 분들을 생각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는 듯이 행사도 많지만 난 그런 행사보다 우리가 진정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고민한다.
딸의 질문에 늦은 대답을 여기에 적어보려고 한다.
" 포로는 말이야. 우리 편이 나니 다른 편을 전쟁 중 사로잡았을 때 가리키는 말이야. 보통 전쟁 상황에서 쓰는 말이지. 전쟁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돼. 일부 몇 사람들의 욕심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고통받거든. 전쟁 때 사로잡힌 포로는 인간다운 대우를 받을 수 없어. 사람이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일도 하곤 해.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전쟁은 벌어지고 있고 상처받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아. 그 사람들도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야. 재미있는 것을 보면 웃고,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 하고, 친구랑 놀고 싶고,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거야. 전쟁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름조차 못 남기게 하고 포로로만 남게 하는 것 같아."
6월, 모내기를 끝내고 모가 논에 뿌리를 내리도록 농부가 가장 유난을 떨며 분주한 시기다.
마른하늘을 보며 이제나 저제나 비가 내리는지 바람은 어디로 부는지 옆집 논은 모가 잘 자라는지
일 년 중 가장 배고프고 가장 기대하는 때.
그때.
그들은 가족과 고향을 떠나 어떤 이념을 갖고 싸워왔던 그 전장에서 어떤 이유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두고 온 가족과 푸른 논을 떠올렸을까?
포로수용소를 다 돌아보고 집으로 가는 길.
사람들이 오고 가는 길 옆에는 여전히 철조망과 지붕도 없이 터만 남은 옛 수용소가 이어졌다.
이곳에서 잠들었을 포로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이념을 모두 떠나 꿈만은 행복한 꿈이었길 6월이면 생각한다.
- 위 글은 거제 옥포대첩 기념 축제 백일장에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