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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드는 소풍 전날 밤

by 다시

D-1. 내일 드디어 현장체험학습이다.

장소는 학교에서 15분 거리의 해양 박물관이다.

도시락도 간식도 없다. 현장체험학습 끝나면 학교에서 급식 먹고 보내면 된다.

8시 40분에 버스 타러 교실 출발해서 12시 30분이면 학교로 돌아오는 정말 간단한 일정이다.

그런데 간단하지가 않다.


일단 여름 방학 전 7월 중순에 학교운영위원회에 안건을 심의받아야 해서 2학기 현장체험학습 계획을 수립했다. 계획 수립에 앞서 장소, 일시, 예산 등을 학년에서 서너 차례 회의했다. 장소 선점은 필수다.

2학기 들어 현장체험학습 관련 기안 제목을 쓰자면


1. 1학년 2학기 현장체험학습 참가 신청서 발송 건의

2. 1학년 2학기 현장체험학습 참가 명단

3. 1학년 2학기 현장체험학습 여행자 보험 가입 건의

4. 1학년 2학기 현장체험학습 참가 경비 안내장 발송 건의

5. 1학년 2학기 현장체험학습 경비 지출 전의

6. 1학년 2학기 현장체험학습 사전답사 출장 및 결과 보고


내일 현장체험학습 후 불참 학생에 대해 경비 환불 기안을 한차례 더 해야 하므로 아직 2학기 현장체험학습 관련 공문 기안이 끝나지 않았다.


4시간의 현장체험학습을 위해 투입된 인원을 알아보자.

1학년 담임 6명, 관리자(교장, 교감) 2명, 특수 교사 1명, 기타 보조인력 3명, 임차 버스 기사 6명, 버스 기사 음주 측정 행정실 차장 1명, 현장체험학습 업무 담당 교사 1명까지 성인 20명이 투입되었다.

이날 급식은 평소 먹던 시간보다 1시간가량 늦게 먹기 때문에 3학년과 급식 순서를 바꿔야 했으므로 3학년 학생 및 교사뿐만 아니라 영양사님까지 협조 인원은 더욱 늘어난다. 현장체험학습인지 임금님 행차인지.


겨우 4시간 현장체험학습 나가는데 뭐 그렇게 번거롭고, 뭐 그렇게 복잡하냐 물으신다면 원래 그랬다.

원래 현장체험학습은 그렇게 간단하고 예삿일은 아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것은 사전 작업에 불과하다. 공문 기안이야 원래 담임교사가 하는 일이고, 해야 하는 것보다 줄어든 것은 버스 임대차 계약은 안 하는 것 정도였다. 학급수가 많은 학교라서 현장체험학습 업무 담당 교사가 있어 그 부분과 전체 계획 기안은 담임이 하지 않았지만 버스 계약까지 교사가 한다.

한 번의 현장체험학습에 수업 끝난 후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협의회를 하고, 사전 답사를 하고, 공문을 기안하는 것이 그동안 교사들이 했던 일이다.


한 가지 덧붙일 것 현장체험학습 안내장이 나간 이후 아이들의 연이은 질문 폭격에 성실히 대답해야 하고, 1주일 전부터 각종 안전교육을 실시하고, 알림장, 소통 채널(하이톡 등)에 준비물 등 안내 사항을 빼곡히 안내를 하고 또 한다. 그래도 아이들은 전날까지 물어본다.

"선생님 도시락 싸와요?"

"선생님 우리 어디 가요?"

"선생님 뭐 입고 와요?"


한치의 빈틈이 허용치 않는다. 버스 탑승 안전교육, 전시 관람 예절, 실외 활동 안전 교육, 심지어 요즘 아동 유괴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뉴스에서 언급되다 보니 이 부분까지 안전교육을 해야 했다.


그리고 대망의 당일!

아침부터 초긴장 상태로 아이들을 만나야 한다.

소풍 가는 날! 공부 안 하는 날! 아이들의 마음을 이미 하늘에 둥실둥실 떠 있는데 그 마음을 하나하나 잡아 버스까지 데리고 가고, 버스에서 안전띠 착용했는지 확인하고, 버스 운전기사님 안전 운전하시는지 확인도 해야 하고, 멀미하는 아이들 대비 구토 봉지는 이미 주머니에 있는 상태에서 도착하면 줄 세워서 체험 비로소 시작이다. 도착하자마자 진이 다 빠진 상태지만 여기서 긴장의 끈을 더욱 바짝 조여야 한다.


우리는 1학년.

학교에서도 줄을 세우면 선생님이 앞서 가건 말건, 친구들이랑 쌩하니 달려가는 아이, 느지막이 걸어오는 아이, 넘어지는 아이, 그 사이에 다투는 아이 별의별 상황이 넘쳐나는데, 장소는 익숙한 학교도 아닌 낯선 장소에서 흥분 상태의 아이들을 어떻게 진정시킬 수 있을까. 물론 가족들과 여행을 갈 때도 준비해야 할 일이 많다. 하지만 4인 가족의 여행 준비와 단 몇 시간짜리 1학년 전체 130여 명의 체험학습의 난이도를 비교하자면 전자는 행복하고, 기대감이 크다면 후자는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은 불안과 걱정의 도가니다.

우리 동네

별것도 아닌 일에 징징대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을까?

안전에 있어 별 것도 아닌 일이 어디 있는가.

큰 재난 앞에서 누구도 사고를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불시에,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너무 애틋한 사람들을 잃지 않았는가.


1학기는 바깥으로 나가는 현장체험학습 대신 체육관에서 1학년 전체 학생들이 모여 체육대회를 했다.

2학기도 가급적 교내에서 할 수 있는 체험활동으로 하고 싶었지만

2학기는 괜찮지 않나? 한 번쯤 교외로 나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강력한 타의에 의해 갑자기 결정된바였다. 학교에서 현장체험학습은 꼭 남겨야 할 추억이라 여전히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한 장의 추억을 위해

누군가는 몇 달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기 위해 준비하는 것을 모른 척하는 건 아닐지.


우리 반 아이들과 학교 밖으로 나가는 것은 내일이 처음이다.

교문 밖을 나갔을 때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어루만지고, 가을 햇살이 머리 위로 따스했으면 좋겠다.

푸른 하늘은 드높고, 아이들 목소리도 웃음소리도 지지 않을 것이다. 학교 아닌 곳에서 아이들과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어 행복할 것이다. 그러면서 좋은 계절을 아이들과 나눌 수 있다면 얼마간의 긴장과 업무는 괜찮다 하며 그동안 했던 일들을 망각할 것이 분명하다.

단호히 기억할 것은 현장체험학습 사고의 책임은 오롯이, 완전히, 온전히, 완벽히 교사만 지는 것이다.

다시 한번..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 동네


초등학교 시절, 소풍 전날 밤 일찍 자려고 누워도 잠이 오질 않았다.

내일 비가 오면 어쩌지? 엄마가 어떤 김밥을 싸줄까? 용돈 받으면 뭐 사 먹지?

부엌에서 풍겨오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에 코가 간질간질해서 일어나면, 눈곱도 떼지 않고 김밥 꽁다리부터 찾았다. 80년대생인 나는 소풍날 학교 운동장 좌판에서 평소엔 가지지 못했던 액수의 용돈을 갖고 무얼 살까 행복한 고민을 하다, 어느새 출발 시간이 되어 교실로 들어가곤 했다.

엄마가 미리 하나 더 넣어줬던 김밥 도시락을 선생님 책상 위에 두거나, 음료수도 놓곤 했다.

아이들은 길게 줄 지어 노래를 부르며 학교 가까이 있는 뒷산에 가거나, 숲에 걸어가서 온 계절을 느꼈다.

도착하자마자 친구들과 모여 앉아 김밥 몇 개를 먹고 나서 더 먹고 싶었던 과자 한 봉지까지 다 먹고, 친구들과 어울려 놓다가 보물 찾기를 했던 기억이,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하다.

우리동네


이런 추억을 지금 아이들에게는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그때의 아이들과 지금의 아이들은 다르다.

1년에 한 번 가족여행은 꿈도 못 꿨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교외체험학습으로 1년에 20일은 가족 여행을 충분히 갈 수 있고, 재량휴업일과, 대체공휴일뿐 아니라, 국내, 해외를 가리지 않고 여행을 다니는 지금의 아이들이 정말 추억을 위해 현장체험학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가족과의 여행이 어려운 아이들도 있음을 안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초임 때부터 지금까지 책임자는 언제나 교사였고, 그때는 교사에 대한 어느 정도 존중도 존경도 있었던 때였다. 그때가 그립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획부터 실행까지 교사의 역할은 늘어가는데, 법적 최종 책임까지 교사의 역할이어야 하는지 다시 되묻고 싶다.

우리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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