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선택이 일년을 결정한다
방학이 아닌데 성탄절을 맞이하는 일은 꽤 드물다. 올해 여름방학이 예년보다 무척 길었던 이유로 아직까지 방학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때는 좋았지만 한해가 끝나는데 아직 학교라니. 아무래도 어제는 성탄절 전날이라 학생들과 주로 크리스마스 관련 만들기를 하고 영화를 봤다. 학기말이니 교육과정 마무리가 다 되고 교과서 진도도 모두 나가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다음 주 방학을 하면 역시 여름방학이 무척 길었던 이유로 예년보다 짧은 겨울방학을 지나 개학 후 아이들과 3주 정도 더 봐야한다. 그 3주 동안 해야 할 분량은 조금씩 남겨야 해서 교과서 진도 나가느라 허겁지겁할 정도로 여유가 없진 않다.
여유 없는 사람은 나다.
학기 말 해야 할 일들을 파도처럼 밀려와서 방학식까지는 일에 떠밀려 가지 않도록 정신을 딱 붙잡고 있어야 한다. 개학 이후는 나중 일이다.
지난주 알뜰시장, 유치원 초청 꿈자랑 발표회(학예회), 인형극 등을 포함한 겨울행복학교 행사를 나름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겨울방학 계획을 세웠고, 1학년 교육과정 마무리하는 협의회를 했다. 수행평가를 모두 하고 입력까지 했다. 학기말 나이스 성적 입력을 대강 마무리했다. 맞춤법 등 수정은 방학 전까지 매일 조금씩 하면 되니까 이것도 마무리했다고 하면 된다. 회의도 많고 말도 많았던 다면평가도 정성평가, 정량평가까지 모두 서류 제출로 끝냈다.
물론 그중 최고는 학년 업무 희망서 제출이었다.
지난주 수요일 한 장짜리 학년 업무 희망서를 제출할 때까지 나왔던 여러 가지 말들을 곱씹어 보았다.
내가 한 선택이 과연 잘한 일일까?
지금 근무하는 학교는 작년에 발령을 받아 왔다.
다른 학교와 다른 점은 학년과 업무에 따라 점수를 환산하여 원하는 학년과 업무를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지금까지 원하는 학년을 했던 일은 거의 없었다. 마음에 딱 맞는 학년도 없거니와 학년 선호도는 내 사정과, 해마다 달라지는 학년 사정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학년마다 점수가 있고, 학년에서 하는 업무(연구, 부장)에 따라 추가점이 있어서, 올해는 내가 원하는 학년에 가지 못하더라도 올해 점수가 높은 학년을 하고 업무를 추가해서 하면 내년에는 내가 하고 싶은 학년을 할 수 있다.
작년에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하고 싶은 학년을 그냥 썼더니, 교감 선생님이 올라와서 다른 학년을 권유하고 그 덕에 학년 부장까지 덥석 떠안았다.
그런 올해를 보내서인지 의도치 않게 나는 우리 학교에서 점수가 가장 높은 사람 중 하나였다.
작년에 5학년(이 학교는 5학년이 점수가 가장 높음), 학년 연구, 올해 1학년 부장까지 하니 나도 모르게 내가 원하는 학년을 골라서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맘때쯤 선생님들끼리 가장 많이 하는 대화 주제는 내년에 어떤 학년 하는지 여부다.
"몇 학년 썼어요?"
이 말을 좀 친하다고 생각하는 선생님들에게는 넌지시 물으며 올해 동향을 살피는 것이다.
나는 친한 선생님들이 많지 않아, 동학년 선생님들께만 살짝씩 물어보았는데 의외로 1학년 다시 하겠다는 선생님들이 많았다. 나는 다시 1학년은 못하겠다고 했더니 이유를 묻는다.
교사 경력 벌써 15년째, 1학년을 제일 많이 했던 것도(4번 정도?) 사실이다. 물론 5학년도 4번, 비슷하게 많이 했다. 2학년 1번, 4학년 1번, 3학년 2번, 전담도 1번 했었구나.
제일 많이 한 학년이 1학년인데, 처음 맡을 때는 결혼도 안 한 이십 대였고, 그다음엔 결혼 후 나도 육아를 하고 있을 때 맡았기 때문에 1학년을 가르치면서, 우리 아이들을 키우는데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1학년 특성을 우리 아이들을 통해서 더 잘 알게 되었고, 우리 아이들 크는 모습을 보면서 1학년 가르칠 때 힌트를 얻기도 했으니까. 또한 1학년 학부모였던 2번의 경험이 1학년 학부모들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았던 것도 담임으로서, 확실히 장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1학년을 가르칠만한 인내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가르친 것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하루가 계속됐던 올해 조금 지쳤던 것 같다.
그래서 지원하는 학년에 과감히 6학년을 썼다.
위에 이미 썼지만 15년의 경력동안 6학년을 한 번도 안 했다. 그동안 다양한 이유로 희망하지 않았던 학년이 6학년이었다. 결혼 전에는 경력이 적어 6학년을 못했고, 아이를 낳고 나서는 수업 부담이 적은 1, 2학년을 했었다. 물론 5학년을 많이 했기 때문에 아이들을 달고 올라가면 되었지만 그때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 특유의 학년말이 될 때 정 떨어지는 일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유독 이뻐했던 몇 년 전 5학년 아이들은 지금도 기억이 날 만큼 수업도 재미있었고, 아이들도 정이 많이 갔지만, 그 아이들을 다시 가르치려고 마음먹었을 때, 분위기가 아슬아슬했던 아이 두 명이 학교폭력 신고를 서로 해대는 일이 발생했었다. 종업식을 며칠 남겨두고, 각 학부모들 상담 전화를 밤늦게까지 하고, 아이들 둘을 데리고 상담도 쉬는 시간, 점심시간, 종례 시간 후까지 며칠 하다 보니 더 가르칠 마음이 말끔히 사라진 것이다.
작년 5학년 아이들도 수업할 때마다 도전정신이 생겼었다. 역사, 영어, 글쓰기, 수학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이들하고 수업 시간이 모자랄 만큼 가르치는 것이 재미있었고 일단 뭘 시키면 재깍 해내는 아이들을 보면서 일종의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래서 6학년을 썼는데, 앞서 말했듯이 6학년 지원자가 많다며, 교감선생님이 1학년 부장을 하는 것이 어떻냐는 권유에 1분 언저리 고민하고 그러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때 6학년 하려고 했으면 아마 했을 것이다. 알고 보니 딱히 6학년에 지원한 선생님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다시 선택의 순간이 왔다.
순간의 선택이 일 년을 결정한다.
업무 학년 희망서를 내기 전 다모임(전체 회의)이 있었다. 목적은 원래 다른 이유로 모였지만 결국은 원하는 학년에 가기 위하여 올해 배정된 점수를 변경하는 것까지 이야기가 나왔다. 이야기가 진행되니 각 학년의 어려움, 그렇기 때문에 기존 배정된 점수는 변경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와 회의가 끝도 없이 늘어졌다.
선생님들의 이야기 속에 올해 선생님들의 학년 지망 풍향계가 보였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머릿속에 저장해야겠다. 확실한 것은 내가 지원한 6학년 분위기가 그렇게 밝지 않다는 것이다.
하긴 급식소 가는 현재 5학년 목소리만 들어도 우렁우렁하고 복도를 내달리는 속도가 남달랐다.
이미 한 선택을 다시 무를 순 없고 결정될 때까지 여러 가지 변수가 있으므로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오늘 크리스마스, 한가로운 오후 6학년 수학 문제지를 풀다가 올해 겨울방학 해야 할 일 목록까지 정해버리고 나니 내년에 대한 기대감이 생겼다.
한 해 농사 잘 지었다고 끝이 아니라 내년 농사를 위해 논밭을 정리하고, 묵은 땅을 고르며 씨앗을 고르면서 준비하는 농부의 마음이 교사의 마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