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준비

by 다시

새벽 수영 강습이 끝나 바삐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같이 강습받는 회원분이 불쑥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 벌써 가요? 아직 방학이잖아요.

-아, 일찍 개학을 해서 저번주부터 출근하고 있어요.

-(아주머니) 우리 아들도 선생인데 걔는 방학이 길더라고. 3월까지 방학이래요.

-예. 요즘은 그렇게 봄방학 없는 학교가 많더라고요.


평소 강습 중 이야기를 많이 나누진 않아도 항상 먼저 가라고 손짓해 주시고 어깨도 두드려 주시던 분이라 내적 친밀감을 갖고 있던 터라 말을 걸어주시니 내심 감사했다. 그리 길지도 않은 대화를 마치고 뒤돌아서서 나오는데 그분이 다른 분과 이야기 나누는 소리를 들었다.


-나 이제 그만 오려고. 8년이나 했으면 많이 했다.

-왜요?

-신입 회원 들어와야 한다고 기존에 오래 했던 사람들은 자유 수영하라고 하대. 뭐 오래 하기도 했고.


더 듣고 싶었는데 나오는 문 앞이라 오래 서 있을 수 없어 나왔다. 서로 이야기할 시간과 기회는 많았다. 하지만 새벽이란 이유로, 동년배가 아니란 이유로, 사실 상대방에게 크게 관심이 없었던 터라 같은 시간에 강습받는 사이 외에 가까워지진 못했다. 같이 수업받는 분을 이젠 자주 마주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나중에 봬요! 인사 한마디는 건넬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준비 없이 맞는 헤어짐은 아무리 가벼운 만남이라도 허전함을 남긴다.

헤어지는데 분명 준비가 필요하다.


지난주 개학 이후 아이들은 겨울방학 모드에서 일상으로 완전히 적응한 모양이다.

개학 첫날 교실에 들어오기까지 엄청난 고난이 느껴지는 얼굴로 책상에 앉더니 그래도 일주일을 잘 보냈고 주말도 잘 지낸 후 오늘 등교했다. 교과서 진도는 대부분 나간 터라 요즘은 교과 주요 내용을 정리하고, 지난 1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그림으로 그리고 있다.


그냥 그림으로 그리면 재미가 없으니까 노래 하나를 정해서, 종이에 노랫말을 나눠 인쇄해 주고, 나머지 공간에 1학년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그리는 방식으로 하고 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이런 형식을 뮤직비디오라고 부르고 이미 3번이나 만들어서 익숙하다. 마지막 곡은 역시 헤어짐에 어울리는 곡으로 해야겠다 싶어 데이식스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로 정했다.

노래가 빠르고 흥겨워서 처음 듣는 아이들도 금세 익숙해져서 음을 흥얼거렸다.

어떤 식으로 그림을 그리는지 예시를 보여주기 위해 재작년 아이들이 했던 뮤직비디오를 보여줬더니 이해를 금방 한다. 나도 오랜만에 그때 그 아이들을 다시 만났다. 오랜만에 보는 아이들, 이름들, 그때의 기억들이 그림과 사진으로 떠오르고, 노래와 어우러져서 짧은 시간이지만 추억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언니 오빠들의 뮤직비디오를 보니 감을 잡았던지 우리 아이들도 어떤 순간을 잡고 그림으로 옮기고 있었다. 여전히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몰라 헤매는 아이들도 옆 친구들의 그림을 보면서 맞아 맞아! 이런 일도 있었지! 나도 이때 재미있었는데! 자기들만의 소소한 추억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 모든 대화와 행동들이 헤어짐을 위한 것인지 아이들은 알고 있을까?

그림의 완성도보다 그림으로 나오기까지 1년을 떠올리고 웃음 짓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서서히 헤어질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며 안녕을 준비하고 나는 반편성과 학교생활기록부와 교실 정리(라고 쓰고 컴퓨터 정리, 책상 정리, 비품 정리, 문서파쇄, 청소, 인수인계 등등 등등 등등 오만가지) 25학년도를 마무리하는 중이다. 지난주에 생활기록부 자기 점검, 동학년 점검, 학년군 점검까지 하교 전담선생님 점검까지 넘겨서 마지막 수정 후 종합일람표와 통지표 뽑기만 남았다.

반편성도 일단락되었다. 전학 가는 아이들이 꽤 되고, 한 반에 문제 행동과 학습 부진 학생들이 고루 들어가게 배치하고, 무엇보다 이름 같은 아이들이 절대 들어가지 않도록 몇 번 검토 후 오늘 거의 마무리했다.

이렇게 다 하고도 내일 전학 간다는 연락이 온다면, 아니 절대 이 아이와 같은 반이 되면 안되다고 민원을 거는 학부모가 있다면 틀어지겠지만 앞으로 이 아이들을 맡은 2학년 담임 선생님들께 욕먹을 정도는 아니게 편성한 것 같다. 물론 정성을 들여 반을 나누어도 새롭게 만나는 아이들이 어떤 시너지를 발휘하여 반 분위기를 만들지는 미지수다.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남아있다. 안녕을 말하기까지 며칠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최선을 다해 멋진 마지막을 만들려고 한다. 같이 한 시간들이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되어 우리의 시간도 한 페이지도 남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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