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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Jun 10. 2022

친구 이야기

얼마 전 친구 아이의 돌이었다. 돌잔치를 하지 않아서 따로 축하금을 보내지 않은 터라 마음이 걸려서 아기 장난감을 하나 사서 보냈다. 별 것 아닌 작은 선물에도 놀라워하고 기뻐하고 고마워하는 친구의 마음씀이 더 고마웠다.

가까이 살면 자주 보고 그랬을 텐데 친구는 서울, 나는 거제에 있다 보니 얼굴 보기 힘들다.

마지막으로 본 게 삼 년 전 친구 결혼식이었을 거다.

친구 결혼식 전날 나는 정말 행복했다.

친구가 결혼을 서울에서 했기 때문이다.

거제에서 서울은 버스로 5시간이 걸린다. 당일 새벽에 출발해도 결혼식에 제시간에 도착하기 어려워서 전날 올라가기로 했다. 결혼하고 합의하에 1박 2일로 외출한 것이 처음이라 친구가 결혼하는데 내가 결혼하는 날보다 더 설렜다.

그날 오후 금요일 수업을 마치고 조퇴한 후 택시를 잡아서 3시 서울행 버스에 올랐을 때 나는 정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타고 있는 것이 버스인지 비행기인지, 구름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들떴었다. 그렇게 다섯 시간을 달려서 서울에 도착하고 결혼식 전날의 친구를 만났다.

익숙하지 않은 지하철을 타고서 친구의 동네를 찾았을  결혼 전날의 친구는 기꺼이 반겨주었고 싱글의 마지막 저녁을 나와 보냈다. 그날 친구와 나눈 대화, 풍경들이 모두 기억나지 않지만 새로운 시작을 앞둔 친구를 가까이에서 응원할  있어서 좋았다.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얗고 무척 말랐던 순한 아이.

첫 기억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이다.

새로 부임해오신 선생님은 우리들과 다양한 활동을 많이 하셨는데 친구와 나는 오후 늦도록 우리 집에서 노래에 맞춰 율동을 준비했다. 그 전에는 같은 반 친구로만 알고 지냈지, 같은 동네도 아니고 별로 친하지 않았지만 그런 활동을 통해 친구와 가까워졌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친구는 소중한 나의 도서관 짝꿍이 되었다.

작은 중학교 한 학년이 3반밖에 없었지만 그 아이와는 같은 반이 된 적이 없었다. 그래도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곳은 도서관이었다. 학교 끝나고 도서관에 가면 그 친구와 나는 시험 준비를 하거나 책을 읽으러 가곤 했다.

그림도 잘 그리고 수학을 잘하던 친구는 심지어 시, 소설도 좋아해서 중학교 때 판타지 소설을 써서 나에게 보여주곤 했다. (그 시절에는 그렇게도 판타지 소설이 인기였다. )

중학교 3학년 땐 진로 고민도 서로 상담해주었다. 사실 집안 형편이 내가 알 정도로 곤란했던 친구는 전주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힘들어했고 나도 내 나름대로 고충이 있어서 서로 메일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했었다.(혹시나 해서 메일을 열어보니... 2001년도에 친구와 나눴던 메일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고등학교는 서로 다른 곳으로 진학을 해서 자주  봐도 고향에 내려가면  같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었다.

수능을 준비하면서 겨울 방학인가 어떤 날은 같이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었다. 친구의 오빠가 전주에 있는 대학에 다녔기 때문에 방학에는 만날  있었다.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같이 영어 독해를 풀고 있었던  같은데 친구가 물었다.

친구: mill 이 무슨 뜻인지 알아?

나 : 어? 밥, 식사 아니야?

친구 : 그건 meal 이구. 아니야. 내가 알아볼게

: ……..

아래층 열람실로 가서 영한사전을 펼치니 mill 제분소, 방앗간이라는 뜻이었다. 그걸 기어이 알아내서 친구한테 알려주고도 마음이 불편했다.

이것도 모르다니..

친구와 공부할  나는 강도높은 자극을 느꼈다.


무척 똑똑하고 성실한 친구였다.

내가 못 가진 것들을 (수학, 그림, 큰 키) 잘했기에 부럽기도 했지만 그런 마음보다는 격려해주고 싶었던 친구였다. 그만큼 열심히 살고 최선을 다했다.

시골 고등학교에서 열심히 공부를 해서 정시에 지방 국립대에 입학했지만 포기하고 재수한  SKY   곳에 입학을 했다. 아무런 스펙 없는 친구가 그렇게 하기까지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지 옆에서  같이 하진 않았지만 멀리서나마 응원했었다.




사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없었다.

간간이 명절에 보면 반갑게 인사하고 그렇게 지냈는데 결혼 이후로 친구와  가까워졌다. 친구는 서울에서 장수까지 새벽 버스를 타고 결혼식에 와주었다.

얼마나 먼 거리였는데 그 거리를 달려와 준 친구에게 고맙다고 말한 것이 다였다.

또 결혼 후 아이를 낳았을 때 친구는 육아로 지쳐있던 나를 찾아준 휴가 같은 친구였다.

여름에 두 번. 겨울에 한 번.

처음 왔을  우리 첫째가 3살이었고 나는 둘째 임신 중이었다. 친구는 집에서 방치되었던 우쿨렐레를 들어서 조율을 하더니 딸에게 동요를 들려주었다.

그때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생생하다.


내 생각을 잘 들어주는 친구.

어려움에 공감해주는 친구.

잘한다 잘한다 힘나는 말을 해주던 친구.


사실 학창 시절의 나는 인싸까지는 아니지만 어딜 가나 아는 사람이 있는 발 넓은 아이였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주목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고 싶어 했다.

 학창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되었을  깨달았다.

그런 나의 행동이 가면이었음을.

그 시절 내 곁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이미 사라지고 그들과 나눴던 우정이라 불렸던 것들은 먼지보다 더 구석에 쌓여 언제 버려졌는지 모른다.

친구가 절실히 필요한 나이가 지나고 친구 대신 연인을 만나고 가족을 만들다 보니 친구들은 카톡 친구 목록에서 볼 수 있는 사이, 그 수많은 이름들은 그저 이름으로 남았고 그나마도 직장 동료들보다도 덜한 사이가 되었다. 


육아를 하고 모든 것들과 떨어져 있을  가끔이라도 나에게 연락을 해주었던 친구는   되었기에  친구가  고마웠다.

그렇게  년이 지나니, 어느새 친구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친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에겐 그런 존재가 되었다.

우리가 같이  25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결같았다고 말할  없다. 그러나 멀리 있어도 가끔 생각나고 진짜 안부를 물어주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따뜻하다.




글을 쓰기 시작한  좋은  파편처럼 돌아다니는 기억들을 붙잡게  이예요.

그저 좋은 친구, 고마운 친구라고 마음으로 생각하는게 다였는데 오늘은 친구와 연락한 김에 친구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추억들을 헤집어서 그때의 나를 끄집어 놓고 보니

지금껏 살아온 나와 그애 모두 대견합니다.

거제 바람의 언덕 앞 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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