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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Aug 12. 2022

모처럼 둘이서

모처럼 우리 둘 뿐이었다.

항상 셋이거나(아들까지), 아니면 넷이었던(남편까지) 우리였지만 모처럼 딸과 나 둘 뿐이었다.

지난 금요일, 친정 대장정 8박 9일을 무사히 마치고 집에 귀가했을 때 나는 탈진 상태였다.
원래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니라 저녁이면 방전되어 곯아떨어지는데 8박 9일을 살림과 육아 및 삼시 세 끼, 아이들과의 여행까지 아무리 깡이 좋아도 그건 내 역량을 최대치 끌어올려도 힘든 일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짐까지 모두 정리한 후로 방전됐다.

아이들은 모처럼 만난 아빠와 밤늦게까지 놀았고 오랜만에 아이들을 본 아이 아빠는 흐물흐물하게 누워있어야 하는 내 상태를 파악하고 그날 저녁, 다음날 아침까지 아이들을 챙기고 먹였다.


토요일은 시댁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억지로 억지로 일어나서 이제 오랜만에 아이들 할머니 댁에 갈 준비를 해야 하는데 도저히 몸이 말을 안 들었다. 가긴 가야 하는데 씻기도 싫고, 먹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은 그 상황, 남편은 말없이 아이들과 협상을 한 듯하다. 그 협상에 넘어간 둘째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할머니 댁에 가자고 했고 첫째는 안 가겠다고 선언한 상태였다.

일단 정신을 차리고 할머니 댁에 오랜만에 가자고 꼬드겼지만 아이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든다.


딸 - 어제 차 많이 타고 왔는데 오늘도 차 타기 싫어.

나 -그래도 할머니 댁에 안 간지 오래됐잖아~ 같이 가자.

딸 - 피곤해. 다음에 가면 되지.

나 - 너 색연필 아직 안 와서 그렇지? 내일이면 도착해. 그냥 가자.

딸 - 싫어. 안 갈 거야.


외갓집에서 말을 잘 들으면 60색 색연필을 사주겠다고 미리 말을 했었고 미리 주문해서 받기만 하면 되는데 그 색연필이 도착하지 않아 딸은 가기 싫어했던 것이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딸은 기어이 안 가겠다고 했고 남편은 둘째만 데리고 집을 나섰다.


남편이 아이만 데리고 본가에 간 것은 지금까지 딱 한 번!

본가에 일이 있어 아침에 출발하여 점심 식사만 하고 오후 늦게  집에 다시 돌아왔던 그때 한 번뿐이었다.

내가 여름, 겨울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일주일 넘게 있었던 것은 물론 혼자 계신 아버지를 위해 남편이 배려해 준 것이긴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살림과 육아를 동시에 해야 했던 나는 친정만 갔다 오면 녹초가 되었고 어느 순간 혼자 친정에 가는 일이 반복될수록 남편은 왜 아이들을 데리고 본가에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짜증으로 바뀌었는데 드디어 혼자서 아이를 데리고 가게 된 것이다.


남편과 둘째가 집을 나서자마자 나는 아직도 마음에 걸려 (어머님, 아버님께 죄송한 마음, 괜히 안 가서 섭섭해하시진 않을까 하는 혼자서 하는 걱정하는 마음 등) 딸아이를 설득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설득이 미묘하게 점점 약해졌고 나는 아이와 소파에 퍼질러 앉아서 그럼 이 주말을 어떻게 보낼까 행복한 고민에 휩싸였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손가락 하나 들 힘도 없다면 억지로 억지로 옷을 갈아입었는데 말이다.

아이도 빙그레 미소를 띠며 엄마랑 뭘 하면 좋을까 생각했다.


일단 더웠기에 에어컨을 틀었다.

그다음 넷플릭스를 켜서 영화를 보았다. 아이들이 요즘 보기 시작한 도라에몽 영화였다.

진구의 멍청한 행동들에 울화통이 터졌지만 편하게 대충 누워서 누룽지를 먹으며 보는 영화는 꿀잼 꿀맛이었다. 그 후 간 곳은 문방구! 색연필이 늦게 도착해서 속상해하는 딸에게 다이어리를 사주겠다고 흘리듯이 말했는데 기막히게 기억하는 딸은 문방구에 가자고 했고 딱 마음에 드는 다이어리 하나를 발견하여 구매! 그 후 바로 옆에 있는 국숫집에서 잔치국수까지 먹고 오후 데이트를 마쳤다.

집에 와보니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색연필까지 맞춤 맞게 도착하여 딸은 환호성을 질렀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주동 둥지국수 - 잔치국수가 더 맛있다


그런데 집이 조용했다.

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우는 소리도, 싸우는 소리도, 엄마 아빠 잔소리도,  우당탕탕 뛰는 소리도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림도 그리고, 다이어리도 꾸미는  딸이 달그락달그락 색연필 꺼내는 소리, 색칠하는 소리만 쓱싹쓱싹 조용히 들렸다.

참으로 조용했다.

언제 이런 고요를 느꼈던지, 아이들이 방학하고 집은 항상 소리로 가득했는데 그 소리들이 모두 에어컨 바람과 함께 날아간 것인지 집은 참으로 적막했다.

새로 산 다이어리에 색연필로 꾸미기.


아, 우리 아들이 없구나.

우리 남편이 지금 없구나.

모처럼 딸과 나, 둘 뿐이구나.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조금은 생소했다.

둘째가 태어난 이후, 우리들은 언제나 같이 움직였다.

같이 학교, 어린이집, 유치원 가고, 같이 돌아오고, 같이 놀이터 가고,  같이 같이 같이 했는데  둘째가 아빠랑 가버리니 둘만 남아서 고요한 시간들을 보내게 된 것이다.


물론 우리 딸이 조용한 어린이는 아니다.

책에서 조금만 웃긴 말이 나와서 엄마, 엄마 부른다.

요즘은 빠직!이라는 말을 배워서 뭔가 마음에 안 들면 빠직! 빠직! 말한다.

새침하게 생겨서는 엄마한테만 보여주는 애교, 개그가 쉴 새 없다.

그런 그 아이도 자기만의 세계가 생기고 있었다.

엄마가 옆에 없어도 그림을 혼자 그리고, 숙제를 하고, 책을 본다. 엄마가 없어도 혼자 놀 거리를 찾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그것이 홀가분했는데,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평소에는  홀가분함과 섭섭함이 둘째의 끊임없는 요구로 인해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번처럼 첫째와 둘만 는데 이토록 조용하니 조금 그리웠던 것이다.

잠시 그렇게 생각을 했을 뿐, 우리는 바쁘고 즐거운 주말을 보냈다.

일단 청소를 했고, 저녁으로 간장 떡볶이를 같이 만들어서 먹었다.

전날 시골에서 따온 봉숭아로 손톱 물들이기도 했고 같이 누워서 도라에몽 영화도 끝까지 봤다.

다음날 일요일은 늦게 일어나서 만둣국도 끓여 먹고 딸은 다이어리 정리, 나는 보던 책에 온전히 집중해서 보았다. 그리고 오후 4, 남편과 둘째가 돌아왔고 우리 가족은 다시 원래대로 시끌시끌 모드로 전환했다.


아이들이 점점 크는 모습은 나에게 어떠한 뿌듯함을 주었다. 곁에서 도와주는 친인척 하나 없이 남편과 나, 오롯이 둘이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경험했던 동동거림, 분주함, 힘겨움이 옅어져 가고 점점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이 뿌듯했다.  그런데 이번 주말, 한없이 고요했던 딸과의 시간을 보내고 하나 둘, 자기의 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는 아이를 보며 뿌듯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허전함이 스며드는 것이 이상했다.

양가 감정

좋으면서 서운한, 편하면서 뭔가 할 일 없나 두리번 거리는 모습.

대립되는 나의 두 마음이 조금은 이상했지만 그래도 딸과 모처럼 둘만 있었던 주말은 좋았다.


아들도 아빠와 할머니댁에서 신나게 놀았는지 올 때는 사마귀 친구를 한 마리 데리고 왔다. 방아깨비를 먹고 있는 사마귀를 데리고 와서 화들짝 놀라서 채집통을 집어 던지면서 소리 한번 지르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렇다.

다음날 사마귀 풀어 주러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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