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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Jun 30. 2023

나를 부른 순간

집 근처 문방구에 가던 길이었다. 주차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서둘러 가던 중에 어떤 여학생이 나를 뚫어져라 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길 건너 문방구로 향하는데 기어코 여학생이 나를 부른다.


"선생님!"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순간, 모르는 여학생에서 언젠가 내 교실에 있었던 한 아이로 돌아간다.

동글동글한 얼굴, 크고 까만 눈, 예쁜 미소까지 8년 전 내가 가르쳤던 아이가 맞았다. 같은 동네에 사는 아이라서 차 타고 지나갈 때 한 두 번 본 기억이 있었는데 이렇게 마주치니 막상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이름을 듣자 아이도, 나도 그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어머! 어머! **아! 언제 이렇게 컸어."


간단하게 안부를 묻고 몇 학년인지 물었더니 벌써 고등학교 2학년이라고 한다. 근처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냥 지나가면 절대 못 알아봤을 것 같았다.

8년 만에 보는데도 알아보는 아이의 눈썰미는 미친 눈썰미를 자부하던 나보다 훨씬 나았다.


사는 곳이 학교 근처라서 예전에 가르쳤던 아이들을 종종 만난다.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 아이들도 있다. 만날 때마다 쑥쑥 크는 아이들을 보면서 대견하기도 했지만 이내 서로 갈 길을 가고 금방 잊어버렸다.

그 아이도 그랬다.

아무리 똑똑하고 예쁘던 아이들이라도 한 해 지내고 다음 학년으로 올려 보내면 그걸로 끝.

내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서서히 그 시간에서 나도, 아이들도 벗어나고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에 또 적응하며 일 년을 보냈었다.

그러다가 이렇게 예전에 가르쳤던 아이들을 만나면 문득 그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2015년, 그 해는 내게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봄, 새학교에서 근무를 시작했고 첫 아이를 가졌다.

여름, 엄마가 돌아가셨고

늦은 가을, 우리 딸이 태어났다.


함양에서만 5년을 근무하고 거제로 내려온 후 첫 학교였다. 개교하는 학교는 처음이었는데 학교가 다 비슷비슷하지라고 쉽게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개학 전 처음 들렸던 학교는 운동장이 없었다. 정문은 공사 중이었다. 계단과 복도에는 시멘트 및 공사 폐기물이 군데군데 가득했다. 1-2주 뒤에 개교할 학교로서 전혀 준비가 안 된 모습이었다.

겨우 콘크리트 먼지를 빼고 아이들을 맞이했는데 처음엔 15명이었던 학생수는 매일 전학을 오는 통에 열명이상 금방 늘어났다. 좁은 교실, 더 좁은 강당, 아직 완공 안된 운동장, 한 학년을 모두 수용하지 못하는 급식실까지 아이들도 나도 개교 몸살을 알았다. 임신 초기에 강당에서 전교 조회를 했는데 너무 많은 학생들이 좁은 강당에 모여 있어 현기증이 나서 쓰러질뻔한 적도 있었다.

그해 봄에는 한창 메르스라는 병까지 유행하여 난생처음 마스크를 끼고 수업을 했던 기억도 난다.


솔직히 힘들었다.

학교 일도 벅찼는데 엄마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주말마다 친정집에 가던 상황이었다.

남편은 회사일로 나보다 더 정신이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던 그런 때였다.


그때 우리 반 아이들은 어땠지?

하나하나 세세히 기억나진 않아도 밝고 명랑했던 아이들이었다. 리코더 불기를 좋아하고 줄넘기를 잘하며 운동을 좋아하던 아이들이었다.

수영을 잘하던 아이, 수학을 좋아하던 아이, 그림을 잘 그리던 아이, 다정하고 재주 많은 아이들이 많았다.

활력이 넘쳤고 말썽도 많았던 10살, 3학년들이었다.  

교실에서 아이들에게서 받는 넘치는 기운 덕분에 그때를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교실에서는 모두 잊을 수 있었다.


뱃속에 아이가 있어도 볼록 나온 배를 내민 채 체육시간에 새천년 건강체조를 했고

점점 멀어져 가는 엄마를 붙잡지도 못하면서 곱셈을 헤매는 아이를 끝까지 붙잡고 계산하게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수업을 했고 아이들과 공부를 했다. 교실에서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로 내 걱정이 모두 묻혔다. 다행이었다. 내가 교사라서 그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의 걱정과 슬픔을 잊는 방법이 될 수 있어 다행이었다.


8년 만에 만난 아이는 여전히 예뻤다.

서른이었던 선생은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10살이었던 아이는 곧 성인이 될 터였다.

너무 예쁘게 자라서 가슴이 아렸다.

아이를 보내고 나도 가던 길을 갔지만 왠지 계속 뒤돌아봤다. 하고 싶었던 말이 그제야 떠올랐다.

'아는 척해줘서 고마워!

그때 내가 너무 힘들어서 너희 한 명 한 명을 모두 신경 쓰지 못해서 정말 미안했는데

나를 기억해 줘서, 모른 척하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불러줘서 고마워."


교사란 어떤 직업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좁은 교실에서 많은 아이들이 부대껴 지낼 때면 본질을 잊을 때가 많다. 그래도 끝까지 부여잡고 가는 것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것을 가르친다는 단 하나의 소명.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내 할 일은 그것인 듯하다.

다시 만나면 더 반갑게 더 따뜻하게 이름을 불러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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