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땅에 비가 내릴 때
영미네 가족 중에 가뭄이 지속이 되고 비상급수체제가 되면서 유난히 활력이 붙은 이가 있었다. 바로 동민이었다. 아파트 앞에 급수차가 오면 얼른 수레와 배수통을 들고 냅다 뛰어갔다. 저녁에 배당된 물을 다 갖고 올라오면 동민은 흐뭇한 표정으로 물을 바라봤다. 자신이 네 식구를 먹여 살린다는 느낌이 들어서 가슴 한쪽이 뿌듯한 마음으로 채워졌다.
“아들 이 무거운 것을 다 나른 거야? 정말 고생했어.” 영미의 칭찬 한마디에 동민은 가슴 한쪽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동민! 너 제법이다. 근데 너는 솔직히 자주 안 씻어도 티도 안 나잖아. 내가 좀 더 씻으면 안 될까” 동희가 동민에게 사정조로 얘기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급수가 시작된 후로 자주 동희는 동민에게 꼬리를 내렸다. “그래 누나가 내 대신 물을 써.” 인심 쓰듯 얘기를 하면 동희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영미가 퇴근 후에 아파트 현관문을 열면 제일 처음 목격하는 장면이 동희와 동민의 싸움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급수가 시작된 이후에 동민이가 물을 배급받고 할당된 물을 동희에게 양보하면서 둘의 관계는 몰라보게 평화로운 상태가 된 것이다. 영미 또한 물을 받아오는 일을 동민이가 거의 챙기고 있어서 한시름을 놓았다. "물을 받으러 가면 새치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 내가 어떤 아저씨한테 차례는 지키라고 만든 거라고 말했어." 동민은 스스로가 대견한 듯 영미에게 말했다. "근데 동민아 사람이 신경이 날카로워지면 맞는 말에도 해코지하는 사람이 있어, 담에는 그냥 모른척해. 알았지?" 영미는 한껏 기분이 올라간 동민이를 타일렀다. 장기간의 장마로 사람들이 많이 예민해져 혹시 나이 어린 동민이가 맞기라도 할까 봐 조바심이 났다.
결혼 전 영미는 사무실 직장상사 때문에 스트레스성 위염을 앓은 적이 있었다. 매사에 트집을 잡고 흔한 말로 영미에게 갑질을 했다. 어느 날부터 속이 쓰리기 시작해서 위장약을 먹어야 할 지경이 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출근길에 지각을 할까 봐 택시를 탔는데 하필이면 사고가 났다. 택시가 불법유턴차와 접촉사고가 났고 앞 조수석에 있던 영미도 타박상을 입었다. 큰 부상은 아니지만 에어백이 터지고 차는 많이 망가질 정도라 영미는 크게 놀랐었다. 다행히 목부위는 괜찮은데 무릎도 멍이 들고 무릎의 통증이 오래갔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날 이후로 위염이 사라졌다. 영미는 그때 사고가 오히려 더 고맙다고 느낄 때가 있다. 타박상은 얼마 없어 다 나았고 사무실 스트레스는 여전했지만 거기에 매몰되었던 정신을 교통사고가 분산을 시켜주니 예전보다는 덜 괴로웠다. 영미는 ‘지금이 그런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요즘 영미의 뇌사진을 찍는다면 거의 대부분 물에 대한 생각일 것이다.
준호의 저녁 식사는 한 번의 이벤트로 끝이 날 줄 알았다. 하지만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저녁을 만드는 준호를 보면서 영미는 새로운 감정이 일어났다.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신대? 많이 불편하실 텐데.” 영미가 물었다. “준수가 엄마랑 가까이 있으니깐 잘 챙겨드리나 봐. 어제도 전화했는데 별일 없으시다고.” 영미는 한동안 준호와 냉랭한 관계여서 시어머니 안부를 거의 묻지 않았었다. 준호는 안부를 물어봐 주는 영미에게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했다. "준수서방님은 어떻게 지내?" "뭐 막일 나가지. 별 수 없잖아. 나도 당분간 빚 갚을 때까지는 아무 일이라도 하라고 했어. 좀 정신 차린 것 같다고 재수 씨도 이혼 이야기는 더 이상 안 한다고 하더라고" 영미와 준호가 이렇게 오래 대화를 한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다.
“아빠. 아빠는 이렇게 요리를 잘하면서 이제까지 왜 안 한 거야?” 동민의 질문에 준호는 겸언쩍었다. 사실 가사는 거의 영미의 몫이었다. 서울로 출퇴근을 하려면 왕복 서너 시간은 걸리는 거리라 아예 집안일을 도울 생각을 안 했다. 그리고 저녁은 거의 밖에서 해결을 했으니 집은 준호에게 잠시 쉬는 장소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