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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하늘 Mar 21. 2024

소를 타다

어린날의 추억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시골집에 소가 두 마리 있었다. 큰 과수원은 물론 먹을 양식을 위해 논도 수 마지기 있었다. 요즘같이 기계가 농사일을 다 하기 전까지는 인력이 매우 필요했다. 우리 집에는 이 노인이라 불리던 사람과 언어 장애인(당시 버버리라고 불렀다.) 노인 등 두 명이 있었으며,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함께 살았다고 한다. 버버리 노인은 눈이 작았고 이 노인은 눈이 컸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 집 아래채에는 두 노인과 소 두 마리가 함께 살았다. 두 노인 중에 특히 이 노인이 기억에 남는다. 소에게 먹일 풀을 하러 갈 때면 손수레를 끌고 갔는데 나를 소등에 태워 가곤 했다. 철부지였던 나는 소등에 탄다는 그 자체가 즐거웠고 소가 걸을 때마다 몸이 좌우로 자동으로 움직이는 것을 신기해했다. 마치 전쟁에 나가는 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나무칼을 들고 “이리야! 빨리 달려라!” 외치면서 말이다. 강변에 가기 전 점방(시골 슈퍼)이 있었는데 거기서 항상 아이스크림 하나를 이 노인이 사 주었다. 그 재미에 항상 따라다녔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을 때쯤 강변에 도착한 나는 소에서 내려 잔디와 풀밭을 돌아다니며 메뚜기, 잠자리와 같은 곤충을 잡아 소 입 안에 넣어 주기도 했다. 소 혓바닥은 생각보다 길고 침이 많이 묻어있다. 날름하고 내 손을 핥을 때면 깜짝 놀라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소등에 풀이 집채만큼 올라가고 손수레에도 풀이 수북이 쌓이면 나는 손수레 위에 올라탔다. 너무 많이 실으면 내가 떨어질 수 있기에 적당히 싣고 나를 태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이 노인은 흥얼흥얼하면서 노래를 불렀는데 무슨 노래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에 돌아오면 이 노인은 풀을 내려 아래채에 가지런히 정리하고 군불을 때었다. 가마솥 김이 모락모락 나면 대야에 물을 담아 두 노인은 세수하고 소에게도 여물을 준 후 저녁 먹을 준비를 했다. 어머니는 정지(부엌)에서 2인용 밥상을 항상 툇마루에 놓았다. 날이 추운 겨울에는 내가 밥상을 들고 두 노인이 사는 방까지 들여다 주기도 하였다. 


 “식사 많이 드세요!”  


 “아이고 진수성찬이네.” (멋쩍은 웃음과 함께)  


 두 노인의 밥상 수거는 나의 몫이었다. 


 “많이 드셨어요?” 


 “아이고 배가 터질 것 같네.” (또 멋쩍은 웃음과 함께) 


 밥상이 가벼워진 것처럼 두 노인과의 추억도 점점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초등학교 3학년까지 소를 탄 기억이 있고 그 이후에는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어떤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버버리 노인이 먼저 집을 떠나고 나중에 이 노인도 집을 떠났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 노인은 고령이었고 더는 일을 못 할 상황이 되었다고 했다. 지금처럼 요양원 같은 시설이 많았던 시절도 아니었다. 부모님은 충북 음성에 있는 꽃동네에 이 노인을 모시기로 하고 서울에 사는 매형이 봉고차로 서울 가는 길에 모셔 드렸다.  


 시골집 뒤에는 ‘우리 집’(천주교 안동교구에서 관리하는 양로원)이라는 양로원이 있었지만, 정원이 차서 못 가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고 한다. 수십 년을 우리와 함께 생활하신 이 노인은 그렇게 시골집을 떠났다. 그 후 한 달여 지났을 무렵인가? 서울 사는 매형이 안동으로 오는 국도에서 이 노인과 비슷하게 생긴 노인을 보았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다음 날 음성에 있는 꽃동네로 전화를 했다. 


 “한 달 전 안동에서 간 이 노인 잘 있습니까?” 


 “온 지 10일 만에 나가셔서 저희도 찾고 있습니다.” 


 그 후 경찰관이 찾고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 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경찰들이 대충 찾았을 수도 있고, 혹여 길에서 객사하여 우리 집에 연락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리라. 아무튼 그렇게 이 노인과 완전히 이별하게 되었다.  

 예전에 이 노인이 본인 이야기를 해 주었던 적이 있다. 얼추 나이를 계산해보면 1910년생이었고 그 당시(87년 우리 집을 떠날 즈음)에도 70대 후반이었던 것 같다. 일제강점기 시대 부모, 형제도 없이 지방 도시에서 거지로 살았다고 한다. 중일전쟁 때 일본군으로 강제 징집되어 중국(만주)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고 남경(난징)에서는 대학살 현장도 목격했다고 한다. 또한 배가 고파 고추밭에 몰래 들어가 매운 고추를 300개 정도 따먹고 배를 채운 이야기도 해 주었다. 그때는 그냥 들었는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경험은 못 했지만, 그때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1945년 해방이 된 후 중국에서 북한을 거쳐 다시 남한으로 내려와서 머슴 일을 시작했고 이집 저집 돌아다니다가 안동 우리 집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가족들과 옛 우리집인 율시헌에 한 달에 한 번 쉬러 가는데 이 노인이 살았던 아래채는 아직도 있고, 그곳을 볼 때면 항상 이 노인이 생각난다. 고된 노동과 외로운 삶으로 눈에는 굵은 주름이 있었지만, 소의 큰 눈을 닮은 이 노인의 선한 눈이 그립다. 다음 생에는 좋은 환경에서 만나 고생하지 말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 나에게 멋진 추억을 선물해준 이 노인, 아니 어르신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싶다. 이 노인이 주무시던 방은 현재 바비큐장으로 변했다. 다음 달에 율시헌에 가면 40년 전처럼 한 상 차려 그 방에 들어갈 생각이다. (이 노인은 안 계시고 우리 가족뿐인 저녁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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