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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하늘 Mar 21. 2024

막걸리와 사랑에 빠졌다.

막믈리에의 일상

십 년 전 소주를 많이 마시고 심하게 술병을 앓고 며칠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그 계기로 한참 술을 끊었다. 소주병만 봐도 구역질이 나고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은 과거의 고통은 잊고 다시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존재이다. 산모가 산통을 겪은 후 다시 둘째를 낳는 것처럼. 술을 끊은 후 모임이나 중요한 술자리가 더 자주 생겼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안 마신다고 하기는 부담이었고 소외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어느 날 중요한 술자리가 생겼다. 잔만 받고 안 마시니 상대방이 왜 안 먹냐고 물었다. 


“이런저런 일이 있어 술을 끊었습니다.” 


“그럼 소주가 아닌 막걸리를 한잔해보시죠” 


(한참을 고민하다가) “예 그럼 한잔만 하겠습니다”



그렇게 막걸리를 만났다. 사실 막걸리와는 친숙하다. 초등학교 때 시골에서 아버지가 새참으로 드시던 막걸리를 조금 먹어본 기억도 있고 성인이 되어서는 비가 오는 날이면 친구들과 잔을 부딪친 경험은 모두가 있을 것이다. ‘막걸리를 많이 마시면 머리가 아프다.’ ‘부모도 못 알아본다’ 등 막걸리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한잔만 하기로 했는데 그날의 분위기와 나의 간이 적셔달라고 아우성치는 바람에 세 병이나 마셨다. 다음날이 되어서도 머리아픔도 없고 더 상태가 좋았다. 


“어! 내 몸이 괜찮네!” 


혼잣말로 중얼거릴 때 뒤에서 누군가 나의 어깨를 툭 쳤다.


“어! 어제 탁주 3병 마시고 팬티에 똥을 싸고 또 입원할 줄 알았는데 쌩쌩하네! 오늘 비도 오는데 한잔 더 먹으러 갑시다!” 


나도 모르게 “어.어.어. 그래!” 약속을 잡아버렸다. 퇴근 후 ‘위인전’이라는 전집에서 이순신 세트 메뉴를 시키고 면천 막걸리(충남 당진시 면천면) 2병이 담긴 양은 한 주전자를 시켰다. 동기 한 명까지 와서 우리 세 명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어느덧 다섯 주전자를 마셨다. 막걸리의 탁함이 바닥에 가라앉을 틈도 없이 원샷을 하며 들이켰다. 양으로 먹는 술이라 화장실을 두어 번 다녀오는 사이 얼큰히 취해 있었다. 동기 한 녀석이 1차는 끝내고 2차로 맥줏집에 가자고 했다. 여기서 다른 술이 들어가면 큰일 날 것 같았다. 


“아니! 오늘은 막걸리만 마시자!”


“알겠습니다. 그럼 두 통만 더 먹읍시다” 


그렇게 열 주전자를 마셨다.(인당 7병)


다음날 같이 먹은 두 명은 반 시체가 되어 종일 힘들었다고 했다. 나는 속이 조금 안 좋을 뿐 괜찮았다. 그 후에도 많이 마시진 않지만 2병 정도 마시면 딱 좋았다. 그렇게 시작한 막걸리는 지금도 마시고 있다. 퇴근 후 집사람과 저녁을 먹으면 꼭 막걸리(태화루 흰 뚜껑)를 반주 삼아 한두 잔씩 마시곤 한다. 지나치면 독이지만 ‘한두 잔은 약으로 먹는다’라고 자가최면을 걸고 마신다. 


막걸리와 사랑에 빠진 지금. 친구들은 나를 막믈리에라고 부른다.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다. 막걸리를 팔지 않는 일식집, 양식집에서도 막걸리를 마신다. 주인에게 허락을 맡은 후 근처 편의점에 가서 사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음식과 함께 나만의 스타일로 마시고 있다. 막걸릿잔이 너무 크면 한꺼번에 넘기기가 힘들어 전용 잔을 항상 휴대하여 다니기도 하였다. 가족과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가거나 출장을 가면 항상 그 지역의 막걸리를 마신다. 거짓말 좀 보태 전국의 모든 막걸리를 마셔본 것 같다. 여러 종류의 막걸리를 먹어본 결과 내가 좋아하는 맛. 너무 새콤하지 않고 적정량의 탄산이 들어있고 코끝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향과 목 넘김 시 온몸으로 전해지는 그 무언가가 나를 자극하는 오묘한 그 맛을 아직도 알아가는 중이다.


수십 년 전 주머니 사정이 충분하지 않던 그 시절! 밥도 먹어야 하고 술도 먹어야 할 때가 있었다. 서민의 애환과 고된 노동을 버틸 수 있게 해준 최고의 술이 막걸리였다. 다른 술에 비해 참 특별한 점도 많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 유리가 아닌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있고 유통기한도 10일 정도로 짧다. 고급 위스키나 양주처럼 오래 두고 먹을 수도 없다. 흙탕물처럼 탁하지만, 일정 기간 가만히 두면 위에는 맑고 밑에는 건대기가 가라앉는다. 마치 조선 시대의 반상이 구분되었던 것처럼. 흔들고 바로 따면 사정없이 토를 해서 바지에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이런 막걸리가 최근에는 촌스러움을 벗고 ‘라이스 와인’이란 이름으로 세계적으로도 알려지고 어떤 제품은 한 병에 3만 원짜리도 생겼다. 당연히 먹어봤지만 내 입에는 2,000원짜리 태화루가 제일 맛있다. 


어제도 한 병 마셨고 오늘도 한 병 그리고 내일도 한 병 막걸리를 마실 것이다. 10여 년 전부터 내 인생에서 막걸리를 빼면 할 이야기가 없을 정도로 사랑에 빠졌다. 냉장고에서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막걸리를 위해 오늘도 퇴근 후 액셀을 강하게 밟는다.


“조금만 기다려! 오빠가 흔들어 주러 빨리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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