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과 소신공양 사이의 붓다(3)
초기 대승경전『금강경』마지막에 무주(無住, apratiṣṭhita)라는 단어가 나온다. ‘어떤 곳에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단순히 탐욕이나 증오만이 아니라 그 어떠한 형태의 모든 관심도 포기하여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이렇게 이해되면서 일부『전생담(前生譚, Jātaka)』이나『비유경(譬喩經, Avadāna)』과 아울러『법화경』등에서, 자기희생이나 자살을 구원의 한 방편으로 여기는 생각이 출현하였다. 분명히 이것은 자신의 복리(自利)와 타인의 복리를 모두 인정한 붓다의 가르침이나 초기불교의 전통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종교학자인 엘리아데는 자기 파괴, 즉 자살의 ‘욕망’이 다른 갈망과 더불어 비난되고 있음에 주목했다. 자살로 이어지는 소멸의 욕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욕구이다. 자살을 하면 윤회가 정지되지 않으므로 불교가 추구하는 자유, 열반에 이를 수가 없다. 붓다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다. 허무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자살로 이어진다.
어떤 경우에도 극단선택에 반대하는 것은 인간사회의 보편적인 합의이다. 생명의 가치를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고 전파해야 할 종교가 오히려 이를 왜곡하고 있다. ‘누리 꾼’의 댓글 중에는 “자살을 ‘입적’이라는 말로 포장하지 말라.” “절간에 방화까지 해서 자살하는 건 범죄다.” 등의 반응이 많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