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돼서 오눌 하루의 삶을 돌아보았다. 알고 보니 오늘도 하루만큼 나는 죽어있었다.
삶은 예측이 안 되지만 마지막은 결정되어 있다. 인간은 ‘독배(毒杯)’를 안고 태어난다. 시한부 삶을 선고받고 태어나는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는 ‘기쁨의 원천에 기생하는 벌레’라고 말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나는 인간이다. 고로 나도 죽는다. 인간이 죽을 확률은 100%이다. 그래서 역사란 사람들이 계속 태어나고 죽은 발자취라고도 할 수 있다. 삶과 죽음은 하나이며, 삶이란 죽음으로 가는 경로이다. 톨스토이는 소설『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이렇게 썼다. “죽은 것만 같은 공직생활과 돈 걱정들, 그렇게 1년이 가고 10년이 갔다. 언제나 똑같은 생활이었다. 하루를 살면 하루 더 죽어가는 그런 삶이었다. 한 걸음씩 산을 오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한 걸음씩 산을 내려가고 있었던 거야. 그래, 맞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산을 오른다고 봤지만 내 발 밑에서는 서서히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었던 거야. 그래, 결국 이렇게 됐지. 죽는 일만 남은 것이다.” 우리의 삶은 임종 직전까지이다.
공자,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예수 모두 어느 누구도 육신의 죽음을 피하지 못하였다. “지는 꽃잎처럼 현자는 그렇게 가는구나.”(공자의 최후의 말) 단지 그들의 죽음에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었을 뿐이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듯이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음을 맞는다.
‘우리’ 우주가 138억 년 전에 탄생되었다면 인간은 138억 년 동안 존재하지 않다가 불현 듯 태어나 잠깐 살다가 죽는다. 어느 뇌 과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듯이, 우리는 더 이상 없는 죽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음은 태어나기 전과 같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지 우리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태어남을 피할 수 없었듯이 죽음을 피할 수도 없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확실성이다. 모든 생명이 그렇고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아득하게 멀게만 생각되던 것, 그러다 문득 어느 날 다가와 직면하는 것,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우리 모두는 산다고 생각했지만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단지 그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고 또 가까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떠오르지 않았을 뿐이다. 죽음을 잊고 사는 것은 젊음의 특혜이지만 그것도 잠시이다. 어느새 갑자기 죽음이 눈앞에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다. 삶은 머지않아 끝난다. 내가 산 1년은 내 삶의 1%임을 아는가? 죽음에는 동정이나 유예란 없다. 똑딱똑딱 차갑게 시계는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