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출간한 <미래형 인재 자녀교육>을 2022년 9월 5일 업데이트 한 글입니다.
세계 모든 나라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질문을 많이 한다. 질문을 제기하는 능력은 인간이 가진 최고의 재능이다. 침팬지 같은 영장류도 훈련시키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지만, 스스로 질문하지는 못한다. 영장류는 수학이나 과학 문제를 풀 수 없지만 인간은 가능하다. 태어날 때에는 수학을 풀 수 있는 능력이 없지만 뇌의 가소성으로 뇌가 발달하면서 이것이 가능해진다. 아이들의 호기심에서 나오는 질문, 그리고 그 질문을 통하여 하는 토론은 최고의 교육 방법이다. 또한, 질문과 토론은 교육의 본질이다.
프랑스의 지식 전문가인 이드리스 아베르칸(Idriss Aberrkane)은 이런 말을 했다.
“아이들의 뇌는 자연스러운 호기심으로 가득하건만, 우리는 그 뇌에 어떤 씨를 뿌리는가? 좌절, 불안, 조건화, 복종, 고통, 감금에 익숙한 뇌다.”
아이들은 호기심이 많고 의문도 많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키워 주는 것이 교육이다. 단순하게 지식을 입력시키는 것은 아이들을 조건화하고 감금하는 잘못된 교육방식이다.
질문과 토론에 의한 교육방식은 메타인지와 관련이 있다. 메타인지는 ‘생각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 또한, 자신이 실제로 아는 것과 안다고 착각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메타인지이다. 자아 인식이 자기 자신을 자기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듯이 메타인지는 자기의 지식을 자기 스스로 아는 것이다. 자아 인식이 인간만이 ‘독특하게’ 가진 특별한 능력이듯이 이러한 메타인지를 가진 사람은 남다르다.
메타인지는 1979년 처음으로 학계에 도입된 용어이다. 한 단계 고차원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안다는 뜻의 인지(Recognition)를 결합한 용어이다. 자신의 인지 능력을 스스로 알아내고, 이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다.
메타인지는 학생에게 지식을 주입시킬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식을 찾아내고 배울 수 있도록 능력을 키워야 함을 알려준다. 아이들의 호기심은 저절로 질문을 하게 한다. 스스로 질문을 제기하고 질문에 답을 하면서 자신의 지식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야 말로 메타인지에 의한 학습이다. 그래서 나 홀로 주입식으로 강의를 듣는 것보다는 여럿이서 토론하고 대화하며 공부하는 것이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질문과 대화를 통해 자신이 아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지,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지하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을 바꾸는 발견이나 연구는 엉뚱한 의문 제기, 우연과 실패한 경험에서 얻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를 과학사에서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고 한다. 그것은 정답만 풀어내는 방식으로는 어렵다. 지적 호기심은 의문을 낳고, 그 의문에 질문을 하면서 지적 호기심이 재창출된다. 결국 질문 없는 교실은 교육을 망친다.
질문과 토론을 중심으로 한 교육은 유대인 교육의 핵심이다. 유대인은 전 세계 인구의 1%도 안 되는데도 노벨상 전체 수상자 가운데 30%를 차지한다. 미국 명문 대학 입학생의 20~30%가 유대인이다. 아인슈타인, 프로이드, 스필버그도 유대인이다. 유대인 아이들은 학교에서 서로 자유롭게 질문하고 토론한다. 1919년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였던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B. Veblen, 1857~1929)은 유대인 탁월함의 비결은 의심하는 태도(skeptical animus)라고 주장했다. 이점은 유대인이 경전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나온다. 카렌 암스트롱의 저서『성서 이펙트』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최초의 쌍방향 경전이며…학생들 역시 랍비들이 했던 것과 같이 토론에 참여해 자기 나름대로 경전 해석에 공헌했다.…각각의 페이지마다 학생들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빈칸이 마련돼 있었다. 학생들은…누구의 말도 최종적인 발언이 아니라는 점, 진실은 계속 변화한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학생은 반드시 자기 자신의 의견(게마라)를 성스러운 페이지에 더해야 한다.” 경전을 공부하면서도 모든 것을 의심하고 반문하는 전통을 가진 것이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학교에서 침묵하고 듣기만 하거나 수면부족으로 잠을 자고 있으니 정반대이다.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인건도 자녀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저녁 식사를 할 때마다 회의적 사고와 우주에 관련된 주제로 대화를 했다. 자녀와 끊임없이 ‘왜 그럴까?’라는 질문을 주고받았다. 칼 세이건은 어떠한 경우에도 ‘누군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또는 ‘그건 원래 그런 거야’라고 답하지 못하게 했다. 모든 질문에는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솔직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특히 칼 세이건은 어떤 것이 사실이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것을 경계했다. 오직 진실만이 비판을 견딜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아인슈타인이라는 천재는 저절로 탄생한 것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은 안식일에 가난한 학생을 초대하여 자녀를 돌봐주게 하고 학비를 지원하였다. 아인슈타인의 부모는 막스라는 의대생을 초대했다. 막스는 아인슈타인이 자연에 관심이 많은 것을 알고 다양한 과학책을 가져다주었다. 아인슈타인이 12세가 되자 유클리드 기하학을 가르치며 질의응답을 통해 스스로 깨우치게 했다. 이후 관심을 과학과 철학으로 넓혀주어 뉴턴, 스피노자, 데카르트의 책들을 섭렵하게 했다. 13세 때에는 칸트의『순수 이성 비판』을 읽으며 토론했다. 대학을 다닐 때 수업에는 거의 출석하지 않고 친구들과 토론하며 보냈다. 1902년 스위스 특허청에 취직했을 때 직장 상사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논리학』에 근거한 사고 훈련을 받았다. 아인슈타인은 토론 모임을 ‘올림피아 아카데미’로 이름 짓고 토론에 열중했다. 칼 피어슨의『과학 문법』, 앙리 푸앵카레의『과학과 가설』, 존 스튜어트 밀의『논리학 체계』등을 읽으며 토론했다. 책의 중요한 부분은 며칠씩 토론했다. 이때 의견들이 부딪치면서 불꽃 튀는 창의성이 발현되곤 했다. 이것이 그의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이 1955년 <LIFE>와의 인터뷰에서 남긴 말은 교육에 있어서 명언 중의 명언이다.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호기심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질문과 토론은 우리나라 학교에서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입시위주의 교육풍토에서 최소한 가정에서나마 질문과 체험학습, 그리고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가기를 바라지만, 우리나라에서 실천하기에는 쉽지 않은 교육방식이다. 어렵더라도 집에서 나마 부모와 자녀가 함께 질문하고 토론 하는 장을 잘 유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이들이 무슨 질문을 하더라도 우선 들어줘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을 하나만 말해 주는 것보다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 좋다. 틀리더라도 아이의 의견이 나오면 칭찬해 주고 토론을 하여야 한다. 아이의 의견을 존중해 주고 들어주는 것이 질문과 토론 교육의 시작이다. 필자도 이런 교육에 익숙하지 않아 아이들을 키울 때 그렇게 못한 것이 후회된다. 사실 필자도 우리나라에서 교육받으면서 질문과 토론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다.
질문과 토론은 비단 아이들의 교육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현대 사회는 지식이 축적되면서 발전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다. 지식의 반감기, 대학에서 배운 지식의 절반이 무력해지는 기간이 7년이다. 앞으로는 더 짧아질 것이다. 지식의 반감기가 줄어드니 대학은 지식을 배운 사람이 아니라 지식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을 길러야 한다. 지식 전달을 넘어 학생들의 역량을 키워 주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질문하는 능력, 의문을 제기하는 능력,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능력 말이다. 평생 배움의 자세를 갖춘 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더욱이 인간의 수명이 90세, 100세까지 늘어서 평생 학습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