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노예나 평민으로 태어나는 신분제 사회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자신이 왕이나 귀족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을 많을 것이다. 신분이라는 것은 아마도 인간 또는 최소한 유인원에게 선천적인 측면이 강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신분제도는 없어졌지만 인간은 여전히 은근하고도 노골적으로 신분을 추구한다. 현대사회에서 돈과 권력이 사실상 신분이 되었다. 고가의 명품에 열광하는 것도 신분을 상징한다. 명품이 대중화되면서 ‘글로벌’ 부호들은 거액의 기부로 과시한다. 자녀를 돈을 들여 하버드대학 등 명문대학에 보내는 것도 명품의 일종이다. 인간의 신분 추구는 진화과정에서 유인원을 거쳐 인간에게 전달된 유전 현상인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과거 시험은 벼슬을 얻는 길이었고 조선 후기에는 매번 수십만 명에 달하는 응시자가 몰렸다. 평민 출신 합격자도 많았고 노비도 있었다. 양반도 대를 이어 과거 시험에 계속 불합격하면 평민이 되었다. 5세부터 글공부를 시작하여 30세가 넘어서 합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조선 시대는 한번 고관대작에 오르면 몇 대에 걸쳐 양반으로 인정되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이 개인의 능력으로 결정된다. 신분의 세습이 없어진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출세’하기 위하여 잠을 줄여가며 대학입시 공부를 하고 고시공부를 하며 유학을 간다. 대학은 학문이 아니라 ‘신분’을 높이기 위한 통과의례가 된 것이다. 2018년 말에 방영된 ‘SKY 캐슬’은 그야말로 대학이 학문이 아니라 신분상승과 신분세습의 수단임을 풍자하는 드라마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불합리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대한민국 ‘막장’ 드라마이자 현실이다. 교육의 질에 대한 논의는 소멸되고 오직 입시제도만을 논한다. 교수는 교육, 의사는 의료, 법관은 정의라기보다는 승리한 사람이 가지는 전리품이 같은 것이 되었다.
인간 사회는 어떤 식으로든 ‘사다리’ 모양의 구조가 존재한다. 신분제도는 아니지만 군대에서는 계급, 조직에서는 위계질서, 경제적 계층, 공직에서의 서열, 기업에서의 지위가 존재한다. 공식적인 신분제도란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기업에서는 사장부터 말단 사원, 군대는 사령관부터 이등병, 관료는 대통령부터 말단 공무원 등 위계가 있다. 경제적 수준이나 서열에 따라 사실상의 계층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 평등이 공식적이고 보편적 가치가 되었지만 현실에서 사실상의 ‘신분’은 여전히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지위는 체계적으로 ‘경영’하기 위한 또는 관리하기 위한 기능상의 분화이다. 그러나 고급관료, 판사와 검사, 대기업 기업주는 사회에서 분명히 ‘힘’이 다르고 사는 것도 과거 왕이나 귀족과 다름이 없다.
인간은 법 앞에 모두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믿음’에 불과한 것이 현실 세계이다. 평등이라는 당위와 신분이라는 현실이 동시에 존재한다. 과거의 신분제도보다 현대의 신분 없는 사회가 훨씬 혼란하다. 공식적으로 신분제도는 없어졌지만 인간 세계에서 ‘뿌리 깊은’ 불평등은 사실 사라지지 않으며 완전하게 없앨 수는 없다. 모두 부와 소득을 ‘n분의 1’로 나눈다는 것은 ‘산수’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불평등의 정도를 축소하는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기회의 평등성과 과정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것이다.